<트렌드코리아 2024>
찬 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호빵도 떠오르고 어제 경복궁 앞길을 걷다가 본 잉어빵도 떠올라요. 몇 년 전에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수 김태원 님이 출연한 '미떼'의 새로운 광고를 기다리다 결국 마시멜로가 들어간 코코아를 사서 부엌 찬장에 채워두기도 했지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마실 거리에는 코코아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따뜻한 글루바인(뱅쇼)은 눈발이 날리는 추운 겨울까지 매일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오면 꼭 챙겨 보아야 할, 어느 순간부터 필독서가 된 책이 있습니다. 바로 김난도 교수가 이끄는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을 짚어보는 <트렌드코리아 2024>입니다. 지인들과 저는 이 책을 줄여서 '트코'라고 부르며 다시 '트코 시즌'이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네, 돌아왔습니다. 다시 새로운 1년을 계획하고 준비해야 할 때가 돌아왔습니다. 올해는 일(신체적, 정신적 활동, 직업, 문제 등)이 많아서인지 '벌써 1년'의 느낌은 없습니다. 다만 그나마 괜찮은 몸과 마음의 상태로 새해가 온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기대될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책이 참 잘 읽혔습니다. 작년에는 너무 지루해서 반만 읽었는데, 올해는 이틀 만에 다 읽었습니다. 정말 흥미롭게 말이죠.
올해도, 늘 그래왔듯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아 용띠에 어울리는 부제를 선정했습니다. 바로 화룡정점의 의미를 담은 'DRAGON EYES'입니다. 책 표지도 임금이 입던 청색 곤룡포와 자수를 놓던 황금색을 매치해 부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아냈습니다.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매년 10개의 키워드를 발표하는데 올해도 부제의 영문 첫 글자에 맞춰 우리 사회의 변화의 근인이 되는 트렌드를 선정했습니다. 10개의 키워드 중에서 작년에는 '나노사회'가 무척 인상 깊었는데, 올해 가장 반가운 단어는 '분초 사회'입니다.
'분초사회'는 요즘 사람들이 극도로 '사랑의 가성비'를 중요시하며 사용 시간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경향성을 지칭하는 키워드다. 시간이 돈만큼, 혹은 돈보다 중요한 희소자원이 되며 모두가 분초(分秒)를 다투며 살게 됐다는 의미에서, '분초사회'라고 명명했다.
시간의 가치가 중요해진 요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로서는 '이게 트렌드야!'라고 선을 그어주니 속이 참 시원합니다. 사실은 밖으로 돌릴 에너지가 없어 온, 오프라인 모임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요즘 제 모습에 든든한 성벽이 되어주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커피 한 잔, 밥 한 끼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인 줄 알지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며 정중한 거절을 받아들이고, 저 역시도 양해를 구해야 할 때가 많은 요즘은 이미 분초 사회의 트렌드에 적응해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튼 시간을 더 잘 쓰고 싶은 경향이 높아졌다는 사회적 트렌드는 나의 시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간에 대한 존중도 함께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어디에서 구해올 수 없는 만큼 소중하지만 잘 관리하지 않으면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쫓기며 살게 됩니다. 책을 다 읽은 뒤 분초 사회가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이래 시간을 빈틈없이 잘 쓰고 싶은 마음(TWS: Time Well Spent, 잘 쓴 시간)이 훅 올라왔습니다.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면 '이게 가능하다고?'라는 물음표 투성이의 일들이 '가능하구나!'라는 감탄사로 바뀌는 경우를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으니까요. 앞에도 썼지만 주말에는 경복궁에 다녀왔습니다. 김포공항 국내선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 역으로 가야 했지요. 그런데 지하철역 입구에서 열 살 겨울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합니다. 3분 뒤에는 우리가 타야 할 지하철이 도착하고 다음 열차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하필 화장실이 고장이라 빙 둘러 다른 화장실을 찾아 가야 했습니다.
'나 이거 참!'
결국 예정 시간인 10시보다 훨씬 더 늦은 10시 50분이 되어서야 우리는 경복궁에 도착했습니다. 여유가 되면 국립 중앙 박물관도 둘러볼 계획이었지만 깔끔하게 접고 경복궁, 고궁박물관, 청와대를 천천히 둘러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지요. 이 코스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고, 주어진 체력을 모두 소비했습니다.
분초 사회라는 단어 속에서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 느꼈습니다. 바쁘게 살며 생산성을 높이는데 열중하라는 것이 분초 사회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시간에 쫓겨 처리한 일들 가운데는 순간의 집중력으로 '창조'적인 결과물을 낸 경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언가 빠진 느낌에 불안하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의 밀린 댓글을 달 때처럼 깊이와 공감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시간을 초 단위로 나누어 살든, 시 단위로 나누어 살든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인 것 같습니다. 빠르게 가야 할 때는 빨리 달리더라도 마음의 속도만은 '안전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2024년을 앞둔 제게 필요한 마음 가짐이자 <트렌드 코리아 2024> 책이 주는 선물입니다. 시간도 돈처럼 써야 할 때는 쓰고, 아껴야 할 때는 아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좌) '결국 사람이 답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결국은 인간이다'는 서문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책을 펼침과 동시에 가슴에 무엇을 간직하며 살아야 할지 결론부터 보여줍니다.
(우)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페이지입니다. 디즈니 시너지 맵 혹은 디즈니 레시피로 불리는 월트 디즈니의 1957년도 메모입니다. 시간의 속도를 늦춰야 할 때는 침대에 꼭 붙어살거나 술잔을 기울이기보다 '무지개인간 레시피'를 만드는 일에 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