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미처 몰랐지요. 정말 한 치 앞도 모르고 -사춘기가 지나갔다고- 브런치북을 펴내기도 했지요.
[브런치북] 너의 사춘기는 어쩜 이리 다정할까 (brunch.co.kr)
아우, 이거 참 어쩌지요. 사춘기로 가는 티켓을 예매해 둔 아들, 딸을 키우는 독자님께는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사춘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토록 다정했던 춘기도 중2가 되니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몇 해 전에 나온 기사를 보면 만 13~14세의 청소년들의 뇌는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어요. 맞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춘기는 그런가 봐요. 요즘 우리 춘기도 그렇거든요.
"춘기야, 이거 제자리에 갖다 놔."
제자리에 두라는 기름종이는 설거지를 다하고 돌아와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춘기야, 제자리에 갖다 놔."
양치를 하고 와도 그 자리에 있고요.
'제자리에 두라니까, 제자리에!'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 싶지만 이런 일로 기분을 망치고 소중한 목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내 마음을 바꿉니다.
'아, 괜히 사줬어.'라고 말이죠. 엄마, 아빠가 여드름이 나지 않은 피부라 사춘기라고 흘러 넘칠 유분(일명 '개기름')도 없을 텐데 문득 흠뻑 젖은 기름종이를 보여주던 제 사춘기 때의 친구가 떠올라 사줬거든요. 그때는 친구와 뭐든 함께하고 싶은 시기잖아요. 저는 말하지 않아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데 춘기는 이렇게 외치는 제 말이 어떻게 안 들릴 수가 있을까요.
오늘부터는 춘기의 기말고사가 시작됩니다. 우리 집 춘기는 보아하니 이번 시험을 잘 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을 노력이 아닌 '놓아버림'으로 풀려는 기미가 계속 보입니다.
아놔, 정말로.
소심: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미루지 않고 있으니 이해하자. 사춘기잖아.
슬픔: 그래, 밤늦게까지 숙제를 해도 자고 일어나면 '오늘의 숙제'가 또 와있잖아. 얼마나 슬플까.
기쁨: 맞아, 안 한다고 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게 어디야. 하다 보면 점점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될 거야.
불안: 하다 보면 점점... 내가 왜 숙제만 하다가 하루를 보내고 있지,라는 의심이 들면 어쩌지.
그러다 잠자러 가기 직전에는 최종 끝판왕, '버럭'이가 출동합니다.
춘기! 숙제 다 했어? 도대체 뭐 했어? 시간을 어-떻게 쓰는 거야?
공부 안 할 거면 빨리 말해. 다른 길 찾아야 되니까.
'버럭'이는 말이 너무 많아 최소 1/5로 줄여 적었습니다. 아무튼 다시 알려드리지만 중2가 되니 다릅니다. 다정했던 춘기도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다행히 갱년기 도입부에 서 있는 제가 바쁘고 몹시 피곤하거나 잃어버렸던 마음의 여유를 찾아 그나마 덜 부딪힐 뿐이지요. 그래도 '버럭'이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참 피곤합니다.
어제는 춘기가 씩씩거리며 말하더라고요.
"엄마 때문에 잠을 못 자겠어요."
예전 같으면 '나 때문에' 잠을 못 자다니 무슨 일인지 듣고 수용하고 반성하고 했을 텐데, 엄마도 경력직이라 이번 일에는 움찔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경력직답게 되물어 보았지요.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오, 정말로. '날 낳으시고 날 기르시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친구를 대할 때처럼 친절한 태도에 감사하는 마음만 더하여라,라는 대답을 하려다가 반감만 살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 마음가짐이 네 삶을 바꾼단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째 더 애매모호해진 대답이지만 언젠가 알아듣겠지요. 어차피 지금은 짧게 말하나 길게 말하나 들리지 않는 사춘기이니까요. 평화롭게 하루를 마무리해서 참 다행입니다.
마음이 놓였을 뿐인데 세상에! '버럭'이로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았더니 알람소리도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자버렸습니다. 6시 30분에 맞춰놓은 알람을 잠결에 끄고 계속 자버렸어요.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7시 51분입니다. 학교 등교 시간이 8시까진지 9시까지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주 푹 자버렸어요. 게다가 오늘부터는 춘기의 기말고사가 시작되는데 말입니다. 악! 춘기도 오만상을 지으며 일어납니다. 아아악!
"춘기야.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감사하는 마음만 생각하자. 그런 마음이면 몸도 가벼워지고 생각보다 빨리 준비할 수 있어. 학교에도 늦지 않아. 지금은 기분 좋은 상태만 생각하자."
계획해 둔 아침 메뉴는 이불과 함께 걷어차고 얼른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차에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소리 지를 일도 없이 학교에 잘 데려다주었고요.
그나저나 시험을 잘 쳐야 할 텐데요. 차분하게 문제를 잘 읽어 실수하지 않도록 하라는 잔소리를 못했는데, 어차피 엄마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사춘기라면 마음으로 써서 보내야겠습니다.
텔레파시야, 마음 우체통에 배달해 줘.
수신자는 우리 집 춘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