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담에 마침표를 꾹
요즘은 찬찬히 나의 역사를 복기하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은 '이상형'과 같은 말은 아니지만 취향을 드러나는, 한때는 소중한 반쪽이였지만 결국 내가 스쳐간 연예인들을 한 명씩 정리해 보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더 명확한 사실은 내 마음이 잠시 머물렀다 떠났다는 것을 그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나는 온 마음을 내어 주었으나 그들은 TV모니터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했고 내 마음도 통할 턱이 없다. 그래도 힘이 필요한 순간마다 나를 건져 준 빛나는 얼굴(이것을 꼭 기억해 주세요)과 재치 있는 입담에 감사를 남기기 위해 혼자만의 '연예담'을 끄적여 본다.
내가 처음으로 TV 브라운관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88년쯤으로 짐작이 된다. 이 추측의 근거는 엄마, 아빠가 들려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요리조리 맞춰본 것인데, 생각이 날듯 말듯한 일을 더 기억이 바래기 전에 들려주시니 감사하고 소중하다. 유치원에 다닐 때쯤 나는 좋아했던 '예쁜 아저씨'가 나오는 MBC 뉴스를 그렇게 챙겨보았단다. 그 아저씨는 바로 손석희 아나운서인데 어른이 되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아주 깜짝 놀랐다. 내 눈이 이렇게 높았나, 60%의 진심을 내보이자면 본디 안목이 높았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낮아졌나 생각하며 놀라기도 했다. 역시 인생은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성숙해지는 것인가. 내게는 겉모습도 그중 하나였나 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제는 시각적 균형을 찾은 것 같다.
다음으로 내가 꽤 오래 마음을 주었던 연예인은 가수 신승훈 오빠이다. 이제는 내 나이가 10대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 반에는 신승훈 오빠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함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부르며 감성에 취해 칠판에 '신승훈 ♡ 무지개인간'이라고 써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애정 표현이었다. 물론 분필로 쓴 글씨는 5교시 시작 전에 흔적 없이 지워졌고, 소녀들의 마음도 오빠에게는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가 부른 노래의 가사와 미성은 귓가에 남아있다. 이런 순수한 것은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법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타나도 흔들리지 않았던 내가 신승훈 오빠를 떠나게 된 것은 'H.O.T' 오빠들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High-five Of Teenagers'로 반드시 '에이치, 오, 티' 혹은 '에쵸티'라고 불러야 했던 다섯 전사들을 보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래서 여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하는가?'
뭘 그렇게까지 생각했냐고 묻고 싶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랬다. 신승훈 오빠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사랑'이지만 배신한다는 것은 마음을 찢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노선을 갈아타고 말았다.
"사실은 오늘 너와의 만남을 정리하고 싶어 널 만난 거야..."
H.O.T 오빠들 이후로는 연예담이 없다. 왜냐하면 진짜로 손을 잡을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나눠 먹고, 영화도 함께 보며 대화도 할 수 있는 연애를 하느라 연예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은행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하루 100명이 넘는 '고객님'들을 모시다 보니 어떤 날에는 용기가 필요했고, 때때로 긍정을 갈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내 삶을 끌어올려줄 에너지를 나눠주는 남자를 찾을 수가 있었다. 20대가 되니 변화가 있다면 '오빠'는 '남자'가 되었다. 에너지 좋은 그 남자는 "좋아! 가는 거야! 하고 싶은 거 하thㅔ요."라고 외치는 MC 노홍철이다. 알록달록한 착장을 하고 두 손목을 붙여 손바닥을 펴고 찍은 그의 사진은 내 눈높이에 딱 맞게 투명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사진 속 그는 내가 고개를 들면 언제나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이 남자는 볼수록 매력적이잖아. 건치야.'
풋풋한 사랑을 지나 어른이 되어 빠진 '연예'는 동시에 몇 사람을 좋아해도 괜찮고, 작별 인사가 더뎌도 괜찮았다. 그러나 쪼개진 사랑은 흐지부지되는가. <무한도전>의 무한 재방송으로 위로받으며 시작된 육아는 '연예'할 시간을 꿀떡 삼켜버렸다. TV를 볼 시간 여유도 없이 바쁘게 엄마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 1순위로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아이들이 좀 커서일까 귀에 꽂힌 목소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가사만 들렸다가 감미로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두 사람'의 주인공인 성시경 오빠인데, 웬걸 이 연예인에게는 다시 '오빠'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이 오빠는 목소리가 얼마나 달콤한지 '성시경 보유국'이라는 댓글에 고개를 끄덕이며, 몇 해 전의 노래들을 찾아들었다. 아, 라이브로 듣고 싶어 태어나 처음으로 콘서트 티켓팅도 도전해 보았구나.
그러나 이제는 연예담도 슬슬 소멸의 시기가 온 듯하다. 인생에 주어진 '연예 시간'을 충분히 즐겼는지 모르겠지만 언제 옷깃이라도 스쳐갈지 모르는 '최애'를 바라보며 인내할 나이가 아닌 듯하다. 이제는 현실직시형이 된 나는 볼 수 없는 성시경 오빠와 곧장 헤어지고 본 적이 있는 김영철 오빠에게로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가 쓴 에세이를 읽으며 적어도 그 오빠의 가치관이나 지난 삶을 글로 만나보았기 때문에 그동안 스쳤던 이들처럼 훅 치고 들어오는 연예인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스며드는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SNS로 추천해 주는 도서는 결이 비슷해서 매번은 아니지만 챙겨서 읽게 된다.
저 높은 하늘에서 빛나던 나의 스타들은 이제 같이 나이를 먹는 이웃이 된 것 같다. 빛나는 얼굴에도 주름이 하나씩 생겼다는 것 외에 가장 큰 변화는 휴대전화의 액정 화면을 통해 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연예인들도 천상계가 아니라 인간계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 나의 연예인들도 나처럼 국밥을 좋아하고, 막걸리도 마시는구나.'
이제 나의 연예담은 신비를 깨고 보통의 사람이지만 조금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다시 또 좋아하는 연예인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2024년을 마무리하며 손석희 아나운서에서 시작된 나의 연예인은 김영철 오빠로 마무리를 짓는다. 마침표 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