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인간 Dec 20. 2024

오래된 것이 주는 편안함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12월은 내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산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 무렵이 되면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산타할아버지'와 '선물'이라는 두 단어가 평생을 설레게 한다. 산타할아버지의 정체와 선물이 누구의 지갑에서 나왔는지 아주 잘 알게 된 어른이 되어서도 12월은 그런 마음으로 남아있다. 설렘. 어린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여전히 크리스마스와 산타할아버지, 선물은 12월 달력을 넘기면 함께 들어있는 세트상품과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12월 달력을 넘기며 크리스마스 시즌을 함께 보낼 '오랜 친구'들을 꺼냈다.

  '후후, 먼지가 앉지는 않았군.'

  습자지에 잘 싸서 보관했던 초록색 크리스마스트리 초를 꺼내고, 코카콜라 한 잔을 나눠줄 것처럼 생긴 흰 곰을 꺼냈다. 그리고 적당한 누군가가 나타나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3년 동안 아껴두었던 눈 덮인 나무 모양의 초도 꺼냈다. 이 초는 큰 손으로 살았던 시절에 애월에 있는 양초 가게에서 주문을 했던 100개의 초 중 마지막 남은 하나인데, 결국 내 것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낯선 집으로 이사를 하고 맞이한 첫겨울에는 오래된 것들이 주는 편안함이 더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이 초는 5년째 겨울을 함께 보내네. 이것 봐, 스트링아트로 만든 산타할아버지야. 기억나?"

  적게는 3년에서 많게는 7년을 함께했던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집안 곳곳에 자리를 잡자 이제야 진짜 겨울이 온 것 같다. 뭐랄까, 이제 이 소품들이 없으면 겨울이 되어도 흰 눈이 내리지 않을 것 같고, 흰 눈에 내려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오래된 것은 겹겹이 시간을 쌓으며 이야기를 만들고 온기를 담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계절에 어울리는 초일뿐이지만 '내 것'이 된 물건과 함께 지낸 시간 속에는 우리만 기억하는 추억이 담겨있다. 예를 들자면 초록의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초에는 2021년 겨울의 이야기가 있다. 58년 만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 수북이 쌓인 눈밭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던 모습이 풍경처럼 따라다니고 이후로는 해마다 같은 배치로 꺼내 놓았던 12월의 습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이토록 오래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던가. 이전까지 나는 내가 싫증을 잘 내고 새것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새 옷과 새 신발은 대체로 첫째인 내가 먼저 입고 신었다. 그러다 작아지면 두 학년이 아래인 여동생이 물려 입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새것을 먼저 쓰는 미안한 마음보다는 새것의 첫 느낌-사람의 흔적이 없이 너무 반듯해서 차갑지만 더 반짝반짝거리는-을 더 오래 기억했다. 이제는 동생이나 나나 더 자랄 가능성이 0.1%도 없는 어른이 되었고 위 대신 옆으로 자라고 있는 내가 동생이 커서 못 입는 옷을 가끔 물려받아 입기도 한다.


  물려받아 입는 옷에도 새것과 같은 반짝거림이 있다. 동생의 취향이 담긴 옷에는 날씬해 보이게 해주는 요술이 들어가 있기도 했고, 나라면 절대 사지 못했을 귀여움이 뿌려져있기도 했다. 가끔은 나에게 주려고 샀나 싶을 정도로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옷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겉모습을 가진 옷이든 물려받은 옷을 입으면 동생의 온기가 느껴진다. 바쁜 아침에 늦지 않게 출근해서 교실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가끔은 학부모 참관 수업을 하는 모습이 상상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 나는 못해'라는 생각이 들며 동생이 자랑스러워진다.


  그런 것을 보면 오래된 물건은 다정할 때가 많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전자제품을 봐도 새로 나온 제품의 기능과 효율이 뛰어날 때가 많으니까. 그리고 사람에게도 이런 기준은 맞지 않는다. 오래 교제하며 만든 추억은 귀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보낸 사람이 가장 편했던 것은 아니니 말이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졌거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든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든 그저 괜찮은 것이다. 다만 오래된 친구에게 나는 언제 만나도 반가운 마음과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편안함은 시간을 저축해야 만들어지는 향이다. 


우리는 오늘도 딱 하루만큼 더 편한 사이가 되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