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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지개인간 Dec 18. 2024

깨진 참기름병

결코 다시 붙일 수 없는

저녁 식사 준비를 끝내고 나와있던 양념류를 냉장고에 넣다가 초록 유리병에 든 참기름병을 깼다. 순식간에 온 부엌에 고소한 참기름 향이 진동을 했고 바닥에는 유리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식탁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제철 굴을 넣은 감바스는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 역시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감춘 채 깨진 참기름병 앞에 서야 했다.

"아, 아까운 참기름."

순간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집 참기름은 명절마다 챙겨주는 엄마의 선물이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언제나 참기름을 챙겨 주신다. 손수 깨농사를 지어 기름을 짜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십 년이 넘게 다니는 단골 참기름방에 미리 부탁해 갓 짠 고소하고 진한 참기름을 사서는 새시 않게 요리조리 잘 묶어 넣어주신다. 어떤 때에는 '됐어'라고 손사래를 쳐도 집에 와서 짐을 풀다 보면 가방에 몰래 들어와 있는 희한한 참기름을 볼 때도 있다.

"엄마는 참기름이 뭐가 아까워? 엄마가 안 다쳐야지."

예전의 엄마가 그랬듯 나도 모르게 '참기름이 아깝다'라고 한 말에 옆에 있던 막내가 어린 시절의 나처럼 대꾸를 한다. 이 나이쯤 되니 깊은 곳에 있던 엄마의 모습이 내 눈에도 서서히 보이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내가 아깝다고 말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 막내도 진심으로 참기름이 아까운데 왜 먼저인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막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깨진 유리 조각은 치우면 되는데 참기름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정말로 아까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막내도 내 말을 이해하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깨친 참기름병을 치우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깨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각을 보니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한 손에 착 감기는 작은 참기름병이 나는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 준 것 같다. 참기름병이 깨지기 전, 그러니까 내가 굴 감바스를 만들 때 내 머릿속은 A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무척 복잡했다. A는 나의 친구인데, A를 만나고 돌아오면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듣은 듯 기분이 묘해진다. 그래서 몇 주를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잊어버리면 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A를 만나러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굴 감바스를 만들고 정리를 하던 오늘 저녁에 갑자기 뿅망치에 맞고 새 사람이 된 것처럼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A가 아는 사람으로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에 걸쳐 일어난 사소한 일과 흐릿한 뒷생각들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변해버렸다.

'이제부터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만 관계를 유지해야겠어.'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편해졌다. 이제는 애매모호한 말을 섞을 일도 없고 곰곰한 기분으로 만남 이후의 후유증을 겪지 않아도 된다. 비록 결심뿐이지만 이렇게 후련한 것을 보니 왜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앓기만 했는지... 여전히 둔한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시간에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참으로 멋진 것 같다. 어제까지의 '나'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면 오늘의 '나'는 적어도 앞뒤가 같은 모습인 사람들과 진심만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졌다. 이제부터는 달라지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미 '오늘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시간을 재기 위해 만든 달력도 연말이 다가오니 참 고마운 도구로 여겨진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에도 하나밖에 없는 어제의 태양이 뜨겠지만, 지는 해는 오늘 A와의 관계를 가지치기한 것처럼 두고 가야 할 것을 잘 싸서 남겨두게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해를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때로는 함께 가고 싶지만 두고 가야 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엄마가 싸주신 참기름도 2025년을 함께 시작하지 못하게 되었다. 참기름은 어울릴만한 때를 찾아 '나야, 참기름'이라고 하며 굴 감바스 안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올리브오일이 워낙 야무지게 자리를 잡고 있는 바람에 결국 쓰이지 못했다. 그러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손에서 미끄러지며 영영 쓰지 못하게 되었다. 아까워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무지개인간아, 참기름 가지고 가래이."

덕분에 오늘의 '나'는 참기름을 챙기던 엄마의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참기름의 향을 더 진하게 새겨 내일로 가게 되었다.

사진, 너는 늘 오늘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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