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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혼란스러워 Dec 29. 2022

향유고래

내직소(내 직업을 소개합니다)

#영투더준(우영우와 이준호)

얼마 전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큰 인기를 끌었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우영우라는 인물이 대형 로펌 변호사로 활약하는 내용을 다룬 드라마였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통쾌해 하고, 다소 엉뚱하고 솔직한 주인공 역을 연기한 배우의 연기력에 빠져들기도 했다.


내가 그 드라마에서 눈여겨 본 등장인물은 우영우 변호사와 팀을 이뤄 일하는 ‘이준호’였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자상한 성격으로 주인공 우영우와 러브스토리를 이어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준호는 법무법인 한바다라는 로펌 송무팀 직원이다. 송무팀이란 소송 업무를 담당하는 팀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이 ‘사무장’으로 인식하는 직원이라고 보면 된다.


드라마 속 ‘이준호’를 보면서 20년 가까이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으로 일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 전까지 내 직업도 드라마 ‘우영우’의 이준호처럼 법률사무소 직원이었다. 흔히 말하는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이다. 주로 하는 일은 상담과 사건 수임계약, 문서 작성 작업 및 의뢰인과의 소통, 내부 직원 및 변호사 등 구성원 인사 관리 등이다. 사무실 운영과 관련된 업무는 거의 다 관여했다.


#사무장

내가 근무했던 사무실은 변호사 7명 내외, 직원 14명 정도로 드라마에 나오는 법무법인 한바다에 비하면 작은 로펌이고 주로 의료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의료분쟁으로 인한 소송과 병원 관련 소송, 법률자문 업무를 주로 했고, 의뢰인은 주로 의료사고를 당한 환자 측이거나 병원 측, 또는 행정·형사적으로 문제가 된 의사 등이 대부분이었다. 소송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1심만 1년 반 내지 2년 넘게 걸리는 경우도 많다 보니 소송 진행에 대해 답답해하는 의뢰인들과 사건이 끝날 때까지 잘 소통하면서 이끌어 가는 것도 나의 역할이었다.


사무장은 변호사를 도와서 사건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다. 분쟁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변호사를 도와 사건의 중재를 맡는 경우도 많다. 분쟁 당사자 중간에서 ‘합의’를 해주는 경우인데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던 사건이 양쪽 당사자가 한발씩 양보해서 합의에 이르게 되는 경우에는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질 가능성이 컸던 사건이 극적 승소로 끝나고 의뢰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도 보람을 느낀다.


Image by StartupStockPhotos from Pixabay


#의뢰인

많은 의뢰인을 만나고 겪어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해서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신세 한탄과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건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며 중간에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사무실로 찾아간 의뢰인도 있었다. 반면에 다른 사무실에서 사건을 진행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우리 사무실로 찾아온 경우도 있다.

내가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게 당연했지만 때론 의뢰인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수임료를 깎아 달라고 조르거나 소송에 부수적인 절차를 무료로 진행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 등이다. 이럴 땐 회사의 이익과 의뢰인의 요구사항을 조화롭게 해결하는 지혜가 필요했는데 조금 고민하고 노력하면 잘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까다로운 의뢰인을 만나서 사건이 끝날 때까지 고생한 적도 있다. 어떤 의뢰인은 사건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대법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본인 사건 진행사항을 계속 검색하고 수시로 연락했다. 새로운 진행사항을 확인하고 제출되는 서류가 있으면 즉시 전화해서 이 서류가 뭐냐, 왜 제출 한 거냐, 왜 바로 확인 안 하냐는 등의 말을 하며 역정을 내고, 사건 진행에 관하여 계속 불만을 제기하는데 심한 경우에는 까다로운 의뢰인 때문에 그만두는 변호사나 직원도 있었다.


돈을 내고 사건을 의뢰했으니 신경이 쓰이고, 변호사가 일을 잘 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과도한 관심과 집착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일단 사건을 맡겼다면 변호사와 직원들을 신뢰하고 필요한 자료와 사실관계를 모두 제공한 뒤 전문가인 변호사에게 진행을 맡기는 게 본인 정신건강에도 좋다.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돈을 내고 사건을 맡기는 것이기도 하다. 전문가를 선임했는데, 계속 직접 진행하는 것과 같은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세월이 흘러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다. 지나고 보니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각자의 생각과 느낌, 감정이 다르니까 의견을 전달하는 태도나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모두 달랐던 거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많은 사건 사고와 의뢰인들을 경험한 건 내 인생에 큰 자산이 됐다. 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았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지혜를 배웠다. 의뢰인들의 성격이나 스타일, 화법은 각양각색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바람

상담하러 온 사람들이 아주 기본적인 법적 절차나 개념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 수준은 높은데 막상 법률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를 모른다. 예를 들어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고소’한다고 하거나, 법원에 가야 하는 문제를 경찰서로 간다고 하는 등이 그렇다.


소송 금액이 크지 않고 사실관계가 간단한 민사 사건은 변호사에게 의뢰하기엔 비용 부담이 크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인도 혼자서 충분히 진행할 수 있다. 거래 대금을 받지 못해서 이를 돌려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할 경우 법원 홈페이지 등에서 양식을 다운로드해서 소장을 작성하거나, 전자소송 사이트에서 쉽게 소장을 작성할 수 있다.


사기를 당했거나, 급여를 받지 못한 경우, 폭행 피해를 당했거나, 악플 등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한 경우 등 형사 피해를 당한 경우 형사 고소장도 일반인 누구나 스스로 작성해서 제출할 수 있다. 간단한 형사 고소 절차는 고소장만 접수하면 수사기관이 수사하므로 변호사의 역할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직접 진행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갖춰야 할 형식과 서류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진행하기 어려워한다.


누구나 간단한 사건 정도는 스스로 진행할 수 있도록 고등학교나 대학교 교육과정에 법률 상식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서 기본적인 법적 절차를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법적 절차에서 “사실은 당사자가, 법률은 판사가”라는 말이 있다. 당사자는 법적 분쟁에 관한 사실관계만 정리해서 제출하면 판단은 판사가 한다는 말이다. 좀 복잡하고 큰 사건은 전문가에게 의뢰를 해야 하겠지만, 간단한 법률문제는 스스로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지면 좋겠다.


#향유고래

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거나 적용되지 않으면 누군가는 특혜를 받는 반면 누군가는 보호받지 못하거나 피해를 입는다. 드라마에서 우영우 변호사가 해결한 사건들도 그런 단면을 잘 보여준다.


드라마에서 우영우 변호사가 사건 해결 실마리를 얻을 때마다 고래가 등장한다. 등장하는 고래 중 향유고래는 무리에서 한 마리만 이탈해도 끝까지 기다려 주고 지켜준다고 한다. 심지어 얕은 물가에서 허우적거리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무리 전체가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법률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 중엔 얕은 물가에서 허우적거리는 향유고래처럼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 법과 원칙도 중요하지만 서로가 곤경에 처한 사회 구성원들을 옆에서 지켜주고 다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보듬어 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


담당했던 사건이나 사건 의뢰인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당시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잘 풀린 사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건도 있다. 그때 통화하던 목소리, 말투, 나의 고민들이 떠오른다. 때로는 피하고 싶은 의뢰인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줄 걸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소송 때문에 지치고 힘들었으니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는 소송 따위에 휘말리는 일이 없이 행복하길 기도한다.



커버 이미지 : Image by Domingo Trejo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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