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갑자기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 초대되었다. 무슨 상황인지 살펴보니 중학교 동창 모임이었다. 오는 9월 말 총동창회 체육대회 참여하기 위해 우리 동기들 단톡방을 만들어 회비를 모금하고 있었다. 당일에 쓰고 남는 돈은 추후 동창회 때 쓴다는 것이었다. 우리 동창은 190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단체 채팅방엔 81명이 있었다. 대부분 기억나는 친구들이지만 몇몇은 누군지 기억이 희미하기도 했다. 한 친구가 계속 공지문을 띄웠다. 회장과 부회장, 총무, 감사도 정해져 있었다. 내가 동창회 모임에 나가지 않고 중학교 때 친구들과 따로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언제 그렇게 동창 모임이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동창회를 조직하고 모임 유지를 위해 그동안 애써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학교 다닐 때 무난하게 두루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채팅방에 참여한 친구들을 보니 다 낯설다. 난 누구와 친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만나면 반갑게 소주 한잔 하면서 옛날 이야기 하고 즐겁게 시간 보낼 수 있는 게 어릴 적 동창이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지나 버린 느낌이다.
회비를 입금할 때마다 총무를 맡은 친구가 이름을 부르며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몇몇은 자주 연락하고 보는 것 같았다. 분위기로 보아 친한 동창들 위주로 단체 채팅방이 유지되고 있었고 이번 행사를 위해 그 방에 없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회비를 모금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가운 이름도 많았다. 그런데 선뜻 인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나가기도 그렇고, 남아 있자니 계속 신경 쓰였다. 회비는 입금할 마음이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르고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고, 다른 몇몇이 아는 체를 하고 그런 상황이 펼쳐질 게 부담스러웠다.
고민하던 중 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본 ‘조용히 나가기’가 생각났다. 이런 상황에서 조용히 나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기능인데 말 그대로 내가 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게 조용히 채팅방에서 나오는 기능이다. 난 결심했다. 조용히 나가기로. 그런데 회비를 안 내고 나가는 게 좀 찜찜했다. 까짓것 얼마나 한다고, 계좌번호를 복사해서 나와의 채팅창에 붙여 넣었다. 잠깐 더 고민했다. 참여자 명단을 다시 보는데 어떤 친구 닉네임이 유난힌 길었다. 닉네임을 최근에 바꾼 듯 요즘 상황을 반영한 극우적 문구를 사용하고 배경화면도 그런 내용으로 가득했다.
동창 모임에서 정치적 성향이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내가 이 방을 나가기로 한 결심을 그 닉네임이 굳혀줬다. 강산이 몇 번 바뀔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없던 친구들이 수두룩한데 그 빈 공간을 채워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다시 한번 이 방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친구들아. 동창 모임은 마음으로 응원할게.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만나는 건 언제든 환영한다.”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나가기’를 클릭했다.
그렇게 어지럽게 오가는 동창들의 메시지 속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아까 복사했던 계좌번호로 회비 5만 원을 보냈다. 이걸로 할 도리는 다 했으며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대화 내용은 궁금해하는 그 상황을 벗어난 걸 잘했다고 생각했다. 원하지 않는 대화와 모임에 나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는 일이 허다했는데 그나마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만들어 준 누군가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