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화두는 '공정'이었다. 표면적으로 현대 사회는 그 과거 어느 때보다 신분이나 성별, 출신 지역, 종교 등에 의한 차별이 없는 '평등'한 시대이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라는 문구가 있다. 정치인들은 '모두가 능력에 따라 기회가 똑같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 말을 자세히 보면 평등은 결과에 있어서의 평등이라기보다는 기회에 있어서의 평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우리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으며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이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정(公正)의 사전적 정의는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 사회가 공평하고 올바르지 않았다는 말인가?
앞서 말했듯 우리 헌법은 모든 영역에서 균등한 기회를 보장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그동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사회 시스템은 공정하게 작동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믿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특정한 한두 개의 사건으로 크게 분출된 면은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불공정이 사회 곳곳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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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가 능력에 따라 기회를 균등히 보장하고, 능력이 있으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업을 갖게 되며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는데 갈수록 부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혹시 우리가 '공정'하다고 믿었던 그 시스템에 치명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하여 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미국에서 발생한 입시 부정 사태가 능력주의에 기인한 결과라고 보면서 능력주의가 가진 문제점과 대안에 대한 담론을 이어간다.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인 경쟁 사회에서 과연 승자가 거머쥐는 보상이 정당한 것인가, 모두가 승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교육을 받고 엘리트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소수의 사람들이 명문대로 통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패자는 굴욕과 패배감만 얻게 되는 이 시스템을 교정할 대안은 없는 것인가. 등이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주요 화두이다.
이 책이 성공한 자들에 대한 패자의 푸념 따위를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제도에 관하여 편협하게 비판만 하자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능력', '기회균등'이라는 말이 어떻게 우리에게 사회가 공정하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고찰한다. 저자는 그 착각의 유래부터 문제점, 대안에 대하여 저자가 생각할 수 있는 반대 논리에 대한 점잖은 설득과 함께 저자 특유의 논리력으로 독자를 설득해 나간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저자의 깊이를 따라가기 어려워 맥락을 놓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꾹 참고 읽어 내려가다 보니 저자가 말하려는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고 한다. 여기서 능력주의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능력에 따른 경쟁의 결과 승자와 패자가 생겨나고 패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졌다고 인식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 부작용조차 공정 경쟁의 결과로 묵인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진보진영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정치적 투쟁을 했으며, 그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생명을 이어갔다. 학력을 기준으로 봤을 때 고학력자에 비해 저학력자가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국 민주당 후보들은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을 자랑하며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지한 세력'으로 치부한다. 좌파 엘리트들의 오만이랄까? 이는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과 우리나라 보수 정당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저 학력자와 빈곤층이 진보 정당보다 보수정당을 더 지지한 사실이 의외의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들(진보 정치인들)은 너무 '지적(知的)'이고자 했다. 기회균등을 너무 추구하다 보니, 능력 지상주의가 되어 버렸고 그 과정에서 생긴 '패배자'들의 아픔을 외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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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능력주의와 세계화가 많은 미국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 같다. 능력주의와 세계화가 왜 진보진영의 구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미국과 한국 사회의 현상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능력주의가 우리 공통의 일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한다. '공정한 사회' 관련한 시민들의 요구는 반칙과 특권을 없애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어떻게 사회적 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패배자들의 공격을 왜 미국의 민주당이 받는 것일까?
정파를 떠나서 엘리트주의는 엘리트가 되지 못한 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기분 나쁜 상황이 계속되면서 세계화로 인하여 일자리 부족, 노동 유연성, 노동가치 하락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능력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민주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 진보 정당의 엘리트, 기술관료들조차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상대의 의견을 듣는 노력을 도외시하고, '무식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태는 은연중에 사회적 약자로 밀려난 자들의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능력이 사회적으로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대신 능력주의로 성공한 사람들의 오만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생각을 바꿔 보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능력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교육과 일에 대한 두 가지 관점에서 풀어 나간다.
예를 들면, 저자는 SAT 점수를 통해 선발하는 대학교육이 '인재 선별기'로 전락되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공정한 것 같아 보이지만, 부유층 자녀들이 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간다는 건 통계로 입증되고 있다.
저자는 무한 경쟁 입시제도의 폐해를 극복하고, '승자 오만, 패자 굴욕'의 악순환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학마다 적정 수준에 이른 입시생들을 모아 추첨을 통해서 합격생을 선발하자고 한다.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유능자를 제비뽑기로 뽑는 대안의 근거는 '능력의 폭정'에 맞설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반론에 대하여 저자는 논리적으로 차분한 설득을 이어간다.
이 방법은 명문대에 합격한 학생이 '나는 오로지 내 실력으로 합격했다'라는 오만과, 합격하지 못한 많은 학생들의 패배감을 지울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인다. 또한 언제 있을지 모르는 입시 부정의 폐단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능력이 아닌 운으로 합격이 좌우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1점 차로 합격이 좌우되는 치열한 경쟁 또한 과연 운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 설득력 있는 반론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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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지적하는 능력주의 문제점에 대한 두 번째 대안은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단 하는 일에 따라 급여 차이가 크고, 노동 환경 차이가 크다. 그렇다면 일의 존엄성은 어떻게 살릴 수 있는 것일까? 보수정치인들은 일반적으로 '낙수효과'식 경제정책을 선호한다. 기업의 규제를 풀어주고 세금을 인하하여 기업이 투자를 활발하게 하고, 돈을 벌게 하면 그 효과가 시장에 미친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을 실행했다. 낙수효과 정책과는 대치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게 옳은 정책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일의 존엄성을 높여야 한다는 샌델이 의견에 어느 쪽이 가까울지는 쉽게 판단이 된다.
저자의 의견 중 인상적인 것은 '급여세'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급여세를 대폭 인하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대신 소비세, 부유세, 금융거래세를 통해 세입 부족분을 메우자고 주장한다. 세금 문제는 항상 뜨거운 이슈이다. 우리나라도 정권의 명운이 걸릴 만큼 세금은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세금이 문제 되는 경우는 부동산 관련 세금이나 주식 양도세, 법인세율 등이 대부분이고 급여세(소득세)가 문제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근로자가 내는 급여소득세에 대하여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투기적 자본의 소득에 대한 세금은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일부 언론이 더 부추기는 경향도 있다. 아무튼, 저자는 일의 존엄을 살리는 방안으로 급여소득세 대폭 인하 또는 폐지를 주장한다.
단타 거래에 한 해 금융거래세를 부과 하자는 디테일도 보여준다. 금융거래세 관련하여 우리나라도 말이 많았는데, 실물경제에 보탬이 되는 '투자'를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단타일수록 세율을 조정하는 방안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의 말대로 오늘날 금융시장은 실물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금융을 위한 금융, 투기를 위한 금융 시장이 된 면이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금융 소득과 근로소득 중 무엇이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인가를 따지는 공적 토론을 필요로 한다"라는 저자의 말은 우리 사회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343p-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353P-
앞서 읽은 데번 프라이스의 《게으르다는 착각》에서 저자는 노숙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책을 풀어 나갔고, 독자들에게 '한없는 연민'을 주문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미국에서 발생한 대형 입시부정 사건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독자들에게 '겸손'을 제안하면서 이야기를 끝낸다. 두 책의 공통점은 패배자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사회구조적 원인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론을 사회적 연대에 필요한 인간의 기본적인 성찰을 주문하는 것으로 내린다는 점에서도 유사한 점이 있다.
능력주의를 주장한 사람들도 처음 의도는 공동의 선에 부합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자체가 갖는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인하여 당초 공정한 기준이 될 수 없었다는 내재적 한계와 함께, 결과론적으로 그것은 많은 한계에 봉착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공정에 대한 요구가 확대되고 있는 시대에 이 책이 우리 사회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능력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격의 결과로 나타난 정치적 결과는 다소 당황스러운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것인 양 능력주의를 주장하고 신봉했던 엘리트들에게 이 책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