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언어, 내 머릿속의 언어

언어가 취미라서요

by Rain Dawson

나의 관심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분야는 언어이다. 나에게 언어란 신기한 세계였다. 2017년, 난생처음 해외여행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언어는 닿을 수 없는 세계로 향하는 비행기 같은 거였다.


학창 시절 내가 사랑했던 과목은 문학, 한문, 제2외국어 일본어였는데, 무조건적으로 배워야 하는 영어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공부한 만큼 점수가 잘 나오기도 했지만 아닐 때도 있었다. 고3 어느 영어시험에선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1 문제만 틀려서 반의 상위권 아이들의 질시 어린 눈빛을 받기도 했다.


'너는 공부도 안 하는 애잖아? 어떻게 1개만 틀렸어?'(너처럼 학교 성적도 신경 안 쓰는 애가 왜 우리 내신을 위협(?)하지?'


또 일본어 시험도 100점인가, 1개만 틀려서 일본 유학 준비하던 친구들의 의아스러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너, 공부 많이 했어?'(평소에 안 한다는 뜻)


중국어도 좋아했다. 황제의 딸이니, 안개비연가, 회옥공주를 포함한 중국 드라마 및 영화들은 중국어의 매력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프랑스어를 좋아했는데 읽지도 못하는 프랑스어 원서를 사 모으기도 했다.


대학 진로를 정할 때 불어불문학과, 영어영문학과, 중어중문학과, 일어일문학과 등 어학계열로 가고 싶었다. 실제로 OO대학교 영어과에 지원, 합격했지만 가지는 않았다. 왜 그때 포기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곳은 모 대학 경찰행정학과였다. 2학년 1학기에 결국 자퇴했지만.

수험생이자 백수의 생활을 하던 2010년대 초반, 영화 슈렉 2를 봤다. 피오나가 사라진 슈렉을 찾으며 아버지인 개구리 황제에게 'Have you seen Shrek?' 묻는 장면이 있다. 이상하게 이 한 문장의 영어가 마음에 들어찼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슈렉 봤어요? 가 뭐가 어떻다고? 아무튼 그때 영어를 몹시 배우고 싶어서 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왜 영문학과예요?라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슈렉 2 속의 대사 때문이에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의 재미와 전공의 따분함은 그 결이 달랐다. 내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3, 4학년 때 간신히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의 1학년 과목을 들어서 평점을 3점으로 간신히 올리고 졸업했다.


관심은 많았지만 전혀 사용할 일이 없던 나만의 영어, 중국어, 일본어.


2017년 처음 일본 여행 가서 배웠던 일본어를 써먹어봤고, 2018년 우연히 알게 된 친구 可可와 중국어 연습을 했다. 그 친구 덕분에 항저우의 절강대라는 곳을 알게 됐고, 어학연수를 가게 됐다.

어학연수 하면서 거의 처음으로 중국어 및 영어를 실제 사람들에게 써보았다. 그곳은 중국이었지만 세계 각국의 친구들이 모이는 곳. 나는 이탈리아 친구로부터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알레산드로에게 배우다가 노에미가 더 잘 가르쳐줘서(미안해 알레산드로) 노에미에게 배웠고, 더 잘 가르쳐줄 수 있다는 친구 마르타를 소개받아 마르타에게 배웠다.


일본인 친구와는 일본영화(클로즈드 노트) 듣고 대본 따라 쓰는 연습을 했고, 미국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며 말하고 듣기는 물론 일기 첨삭까지 받았다. 쇼생크 탈출, 타이타닉 듣고 따라 쓰기도 했다. 이집트 친구에게는 아랍문자를 배우다가 포기하게 됐다. 러시아어도 마찬가지. 콜롬비아 친구에게도 기초 스페인어를 배웠으나 모두 중도포기하고 이탈리아어만은 꽤나 꾸준히 했다. 코ㅡ에짱, 알리야, 그리고 이름 기억나지 않는 러시아인 친구와 콜롬비아 친구. 모두 그립다.


나와 매주 만나서 같이 한국어, 중국어 연습했던 (또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황 씨였던 것만 기억한다, 링링이었던가) 친구도. 잘 지내는지 너무 궁금하다.


어쨌든 수박 겉핥기라고, 거기서 핥을 수 있는 언어는 전부 핥았던(?) 것 같다. 언어로 먹고사는 직업도 아니고 국제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즐겁게 건드려볼 수 있었다.


귀국하고 회사에서 HSK 6급 소지자 대상 중국공안대학으로 유학할 기회를 준다 해서 1개월 만에 신 HSK6급을 땄다. 듣기 평가 오디오 파일 틀어놓고 따라 말하고 따라 쓰며 피 터지게 공부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듬해 코로나가 횡행하며 그 모든 계획은 취소됐고 난 원서조차 내지 못하였다. 내 6급은 역사의 뒤안길로...


미국인 친구와 거의 50권에 달하는 영어 원서를 읽었다.


일본인 친구 와타나베 쥰과 몇 년에 걸쳐 약 스무 권의 일본어, 한국어 원서를 읽었다(2024년 2월 종료). 그는 한국인 여자친구를 만날 겸 나를 보러 내가 사는 도시에 오기도 했다.


2023년 사이버한국외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했다. FLEX 점수는 물론 형편없다.


회사에서 교양으로 이탈리아어 수강 기회를 주어서 강의를 들었다. 나는 중국에서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뗐는데, 이 강의는 기초강좌였다. 그래서 외람되지만 교수님한테 나의 실력이 궁금하다고 테스트를 부탁드렸다. 교수님은 메일로 이탈리아어 텍스트를 보내시면서 번역해 보라고 하셨다. 나는 이탈리아어 사전과 씨름하며 몇 시간 걸려 텍스트를 번역하면서 '아이고 아직 한참 멀었네!' 속으로 끙끙거렸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다음은 내가 교수님께 보낸 메일.


2023. 7. 19.

Italianio per modo di dire

말하기를 위한 이탈리아어

Non sempre quando si capiscono le singole parole che compongono una frase si comprende il senso reale della frase stessa.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낱말들이 항상 그 문장 자체의 뜻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Il significato di “Michele si è̀ bevuto il cervello

non è̀ uguale alla somma dei significati delle singole parole, a meno che non ci si viglia referire alla dscrizione di una scena di un film splatter in cui il protagonista, di nome Michele, beve il suo cervello.

”Michele si è̀ bevuto il cervello “의 뜻은 각각의 단어 뜻의 총합과는 다르다. 미켈레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나오는 스플래터 영화에서 그가 자신의 뇌를 마시는 장면의 묘사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Nell`uso comune la frase significa “Michele è̀ diventato stupido o si comporta in maniera illogica.

이 문장의 보편적인 의미는 미켈레는 멍청해졌다 혹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La frase ‘bersi il cervello’ è̀ cioè̀ un modo di dire: una frase composta da parole il cui senso non corrisponde alla somma del significato solito dei suoi componenti.

즉 이 문장 ‘bersi il cervello’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의 총합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들의 조합인 셈이다.

Si può̀ dire che I modi di dire siano delle frasi istituzionalizzate caratterizzate da un’unità̀ semantica, che vanno quindi studiate in quanto somma e apprese come un tutto indissolubile.

만약 당신이 ‘말하는 방법들?’이란 관습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통일된 기호라고 말할 수 있다면ㅡ 분해되지 않는 모든 것으로써의 총합과 배움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Spesso I modi di dire utilizzano delle immagini figurate che hanno radici nel linguaggio poetico, nella tradizione, nella storia, nella religione, nella letteratura, fino ad arrivare al cinema e alla pubblicità̀

말하기는 종종 시적 언어, 전통, 역사, 종교, 문학작품, 영화나 광고에 근거한 이미지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Attraverso I modi dire si può̀, da un punto di vista ricettivo, comprendere l’identità̀ di una società̀ e, dal punto di vista della produzione, migliorare la propria competenza comunicativa imparando ad utilizare delle forme adequate sotto l’aspetto pragmatico: saper usare il modo di dire giusto al momento opportuno può̀ cambiare l’efficacia di una partecipazione ad una discussione.

말하기는 한 사회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용적인 관점을 주며, 생산적인 관점을 통해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개발하고, 화용론적 측면에서 적절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상황에 맞는 순간에 적절한 말하기를 사용함으로써 대화나 토론에 주는 효과를 바꿀 수 있다.

Già̀ I filosofi greci pensavano che I proverbi e I modi dire fossero(essere) I modelli linguistici attraverso I quali gli uomini tramandavano la lingua degli dei.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잠언과 말하기란 신들의 언어와 같이 사람들이 후세에 전해야 하는 언어적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Aristotele riteneva addirittura che nei proverbi e nei modi di dire si esprimesse la sapienza dell’antica filosofia.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언과 말하기 속에 고대 지혜의 표현이 들어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Italiano per modo di dire, più̀ modestamente, vuole colmare una lacuna nella didattica dell’italiano come lingua straniera e dare una risposta agli studenti più̀ curiosi.

말하기를 위한 이탈리아어는, 좀 더 단순하게, 외국어로써의 이탈리아어 교수법의 공백을 채우고, 호기심 가득한 학생들에게 답을 주기를 원한다.


번역해 봤는데 사전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어요

역시 부족한 점이 속속 드러나는 걸 여실히 느낍니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사이트에서 문법책도 보고 단어도 열심히 외워야겠어요 더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이 번역본 답?을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5일 뒤 교수님의 답장


많은 비가 내린 요즘

별 탈 없으시길 바랍니다.

OOO씨는 하산하셔도 되겠는데요!!


스페인어 공부도 매우 열심히 하신 듯 합니다.

hwp의 상위버전으로 보내주셔서 스마트폰으로 읽었습니다.

제가 한 번역본은 없으나 저희 학생 중에 비교적 잘 된 번역본을 하나 보내드리니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만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원래 계획대로 독서를 하시면 아주 좋을 것 같고요

현지에서의 소통을 원하신다면 Utube,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 영화 등을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휘야 계속 늘어갈 테니 시간이 문제이지요^^


...튼, 다시 한 번 이탈리아어 실력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평온한 주말 저녁을 기원하며





언어는 나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모두 놓아버렸다.

하루 단 15분이라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단 1분도 투자하지 않게 됐다.

요새는 방송통신대 보건환경안전학과 공부를 하고 있다(참 하고 싶은 것도 많지!).

딱히 목표한 바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배워보고 싶어서이다. 보건이든, 환경이든, 안전이든.


요즘 뉴스를 보면 AI에 관한 얘기가 많다. 회계, 통번역 분야에서 AI가 많이 쓰이고 있다는 뉴스. 많은 분야에서 결국 AI가 인간을 밀어낼 것이고, 언어는 취미의 영역으로 전락할 거라는 암울한 전망의 댓글들.


나는 언어의 전문가는 아니므로 크게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데이터를 던져주기가 무섭게 습득한다는 AI와 비교했을 때 나의 언어 습득 능력 및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이니까.

그 분야를 위해 한 우물을 한평생 파는 사람들에게 AI는 위협일까 도움일까. 단순히 언어를 취미로 사랑한 나도 이렇게 사기가 떨어지는데...(당연히 나만의 문제일 수 있다. AI조차 접근불가한 실력을 갖추신 분들이라면 크게 신경 안 쓰실 것 같다).


외국어 원문을 입력하면 그 원문의 오류조차 잡아내는 AI. 완벽한 번역! 내가 배우는 게 의의가 있을까? 차라리 손가락을 더 빨리 놀리거나 정확한 요구사항을 입력하는 법을 배우는 게 더 나으려나?


이런 세상에서 내가 외국어를 힘들게 배워야 할 이유가 뭘까?


거의 모든 분야를 인공지능이 차지할 거라는 이 세상에서 나만의 순수한 신념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우게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어차피 인공지능이 더 잘해, 그들이 알아서 할 거야,라는 핑계를 대며. 모든 것에서 손을 떼게 될까 무섭다.


AI가 건들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타인과 보고 듣고 말하는 과정일 게다. 타인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하는가는 순전히 나에게 달렸다. 타인의 말을 듣고 해석해서 이해하고, 어떻게 문장을 구성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영역이다. 내가 AI 없이 외국어 텍스트에 매달리는 한 그것은 나의 자료이고 나의 정보일 뿐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왜 기쁨이었는가 돌이켜본다.


드라마나 영화, 노래 가사, 심지어 뉴스에서 아는 단어나 문장이 들려올 때 기쁘고 신기했다. 기계의 도움 없이 내가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마치 우주를 경험한 기분이었고. 내가 내 머릿속에 있는 그들 나라의 말을 꺼내서 문장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도, 나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한국어로 대화할 때 저것이 무슨 의미인지 일일이 검색하거나 뉘앙스를 AI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한국인과의 소통에서 언어가 주는 차이 때문에 맥이 끊기는 일은 흔치 않다.


친구와 대화하듯 자유자재로 말을 구사하고 듣기 위해선 결국 내가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언어는 체력 단련과 같은 일이어야 한다. 나보다 운동을 잘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지만 나는 여전히 운동을 한다. 내 오장육부와 신체의 기능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은 내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또한 체력단련은 게을리하면 곧 티가 난다. 금방 숨이 차고 지치는 것이다.


언어 분야는 이미 레드 오션이었는데 거기에 AI까지 가세했다. 내가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있나? 회의가 드는 시점이다. 그러나 내 뇌와 눈, 귀, 입은 위에서 언급했듯 나만의 것이다. 내가 즐겁고 가끔 일터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죽기 전에 내가 사 모은 원서들(심지어 독일어 원서도 있음.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다 읽고 가는 것이 내 삶의 목표다. 공부하고 읽어보다가, 너무 어려우면 AI한테 물어보면서 읽어야겠다. 나보다 잘한다고 해서 질투하거나 척질 필요 없으니 말이다!


다시 하루 15분, 언어의 체력을 단련해 보자.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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