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고
인간관계에서 갑과 을은 어디에든 등장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갑과 을은 계급의 탄생과 함께 시작했다. 계급의 탄생이 평등하던 인간사회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이분화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수렵사회로 대표되는 원시사회에서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의 생산성이 탁월히 낮았기 때문이다. 즉 계급은 생산의 문제였던 것이다.
계급의 시작은 크게 잉여생산물의 탄생과 사유재산의 등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원시사회에 비해 월등히 생산력이 높아진 농경사회에서 잉여생산물이 탄생했다. 이전의 사회가 자급자족하기에도 빠듯했다면 이제는 식량이 남아돌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남은 식량을 누가 갔느냐의 문제가 사유재산제와 맞물려 계급을 탄생시킨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식량을 기준으로 계급이 나눠졌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였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기존의 농토와 일자리를 모두 빼앗긴 노동자 계급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단연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가 갑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갑을관계가 경제적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관계부터 시작해 연인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도 어떻게 보면 모두가 다 갑을관계이다. 친구관계에선 그 관계를 더 유지하고 싶어하는 쪽이 을이 되며 연인관계에선 상대방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을이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을이 되느냐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갑일 수는 없고 반대로 항상 을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상상력'이다. 철학자 라인홀트 니버는 인간이 항상 이기적일 수 없는 이유로 바로 이 상상력을 들었다. 개인이 어떠한 선택을 할 때 바로 이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에서만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고 타인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간의 상상력이 집단이 커질수록 발휘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집단이 커질수록 개인의 이성이 작용하는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그 자리를 집단의 이기심이 자리잡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오늘날의 집단이기주의적 현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자신들의 집값을 떨어뜨리는 장애학교와 같은 혐오시설은 어떻게든 설립되는 것을 반대하면서도 한방병원과 같이 유리한 시설은 어떻게든 유치하기 위해 다각도로 로비하는 최근 사실이 그 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집단이기주의가 계급을 맞났을 때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은 고도로 산업화를 이룩할수록 그 사회의 대부분의 권력이 집중되는 측면이 있다. 한 번 집중된 권력은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특권이 된다. 또 이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오늘의 '갑질'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고용했기 때문에 너의 모든 것은 나의 통제를 따라야 하고 이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생각말이다. 일명 '땅콩회항'으로 유명해진 대한항공 갑질사건부터 최근의 양진호 회장사건, 송명빈 대표사건까지 우리 사회의 갑질이 끝나지 않는 이유다.
민주사회의 기본은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온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공동체의 안정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은 다시 '상상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과거 황현산 교수는 한 칼럼에서 상상력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을 낳는다고 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다시 필요하다.
2018.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