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행복에 대하여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임종. 그런데 불과 삼주가 채 되지 않아 할머니의 병환이 크게 악화되어 시골집에서 정하신 장례식장으로 소환되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나와 아버지의 사이는 참 좋았다. 내가 한창 sns에 빠져있는 시간이 있으면 아버지는 못내 서운해하시며 '그거 좀 조금만 하면 안 돼? 이야기할 시간이 없잖니.' 하시곤 했다. 우리는 짜장면 데이트도, 커피숍 데이트도 자주 가는 단짝 같은 부녀였다.
내 걷는 걸음걸음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바람 한줄기, 햇볕 한 조각, 무심코 발에 채이는 풀 한 포기처럼 생생하나 아련하게 마음을 스친다.
끊는다 다짐하고 한동안 사지 않았던 담배를 한 갑 사서 한 개비 불을 붙이고 연기를 쭉 내쉬어본다. 텁텁한 것이 영 맛이 없다. 아버지는 애연가를 넘어서 살기 위해 담배를 태우시던 분이었다. 매일매일 연명되는 하루가 고단해서 담배를 피우신다고 했다. 언젠가 내가 담배를 피우곤 한다는 것을 아셨을 때 몸에 해로우니 금방 끊거라. 하시던 다정한 목소리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자식과 가정을 위해 참 따뜻한 울타리를 만드시던 분이었다. 엄마가 귀찮아 집안일을 미루시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그 시절 아마도 내게 우울증이 있었던 듯 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둑어둑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여보, 라면 끓여줄까? 아님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을까?" 하며 어린 나를 챙기고는 하셨다. 대장부 같은 엄마가 내가 그림 숙제를 받아오면, 숙제는 혼자서 하라고 내주는 거라고 하실 때, 아빠는 나랑 바닥에 엎드려 누워 스케치북에 뽕뽕 연기가 나는 열기구나, 예쁜 구름과 무지개, 그 하늘을 나는 비행기 같은 조그마한 그림들을 그려 함께 장식해 주시곤 했다.
중 2 시절이었을 것이라 기억되는 어느 날, 학원에서 모의 토익 시험을 보았다. 나는 열심히 풀다가 도저히 뭐가 뭔 말인지 모르겠다 하고 지쳐서 쭈욱 'C'로 답안 마킹을 하고 히죽 웃었다. 이러면 사분지 일타작은 하겠지. 정말 300점 가까이 점수가 나왔는데, 아버지는 그 성적표를 보고, 우리 딸이 어려운 토익 시험을 300점이나 맞다니, 하며 소주를 한 잔 드시고 눈시울을 붉히시며 성적표가 안주라도 되는 듯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보셨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철없이 진실을 밝히냐 마냐의 기로에 서서 졸아있던 그런 기억이 난다.
스무 해, 서른 해, 내 생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는 늘 한결같았다. 마치 자동 입력된 로봇처럼 성실하게 일해 고생바가지를 하시며 집을 일으키셨고, 이제 좀 쉬실 나이가 되셨던 것이 사실 요 근래였던 것이다.
지난여름 나는 아버지와 마지막 여행을 했다. 사실 마지막일지 몰랐던 '첫 번째 부녀 둘만의 여행'이었다. 할머니 생신을 맞아, 유달리 이번에는 꼭 가시고 싶다며 할머니가 얼마 안 남으셨을지 모른다고 애달파하시는 아버지를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진고개를 내가 운전해서 굽이굽이 돌며, 그 옛날 강원도에 하얗고 깨끗한 눈이 아주 많이 내리던 시절을 기억했다.
아빠가 스노 체인을 감는 모습을 쪼그리고 앉아 손을 불며 열심히 쳐다보는 나. 그 내가 운전석에 앉아 같은 길을 가는 성인이 된 것이 마치 별똥별이 떨어지듯 찰나의 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우리는 소금강 시골집에서 할머니를 뵈었고, 아빠가 졸업하신 초등학교와 대학교를 지나치며, 나는 꺄악 거리고 아버지는 자부심 넘치게 그 고되었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셨다. 듣고 또 들어왔던 그 이야기가 머물던 공간을 지나가던 찰나에 참으로 많은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내 태어난 세상에서 아버지와 이별한 지 삼주 가량 된 오늘,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할머니의 빈소 밖 주차장에 앉아 어떤, 상념에 잠긴다.
아버지는 행복하셨을까?
아빠... 하고 부르며 눈을 살짝 감는다. 별 하나 뜬 모양새의 기억 조각은 또 다른 추억으로 꼬리를 물어 별의 궤적을 만든다. 아버지라는 한 존재와 함께했던 별처럼 많은 시간이 은하수처럼 내 가슴에 흘러내려간다.
기억 속으로 걸어가시는 아버지가 뒤돌아 내게 물으시는 것 같다.
"딸아, 행복하니?"
대기의 오염물질이 걷히고, 비나 눈이 한차례 쏟아붓고, 강풍도 한번 내지르고 나면 말갛게 걷힌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될까?
'나는 행복해 아빠.'
내가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환기시키고, 슬플 때 울고 기쁠 때면 티 없이 웃어버리면 나는 수없이 많은 행복의 조각들을 찾아낼 거야. 그리고 밤하늘이 새카매서, 새카마니까 그 별들이 반짝인다는 걸 나는 이제 알아. 아빠 딸이 그걸 알 정도의 나이를 먹었어. 그러니 걱정 말고, 걱정 말고 편히 가, 아빠.
"나는 행복했어. 아빠의 딸이어서.
나는 행복해. 내가 나라서.
그리고 내내 행복할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