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광폭한 '소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기꺼웠던 것이 시들해지고 좋아하던 것이 생경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오감에 육감. 사람이 신체 기관에서 느낄 수 있는 다섯 가지 감각 위에 나는 사람이기에 갖는 여섯 번째 감각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최근에 그 직감의 영역이 감지한 지각변동은 나의 다섯 감각의 메커니즘을 꽤나 뒤흔들었다.
생각을 주체할 수 없고 그것이 감정을 마구 휘저을 때면 차를 몰았다. 창문 네 짝을 모두 열고 귀가 아프게 음악을 틀어 놓아도 크게 민폐가 되지 않을 도로를 골라가며 서해안 바닷가 높은 곳에 위치한 방조제에 들러 잠시 바다를 응시하다 오는 것은 나의 꽤 큰 낙이었다. 돌아오는 길 집 대문을 열면 무거운 추가 달린 듯한 발에서 신발을 벗어 놓을 때 떨어져 내리는 마음을 감안하고서도 좋기만 했던 한 시간 여의 매력적인 도피. '바다 보러 갈 거야.'라고 하면서 나가는 길이어도 사실은 '바다 보러 가는 길에다 모두 버리고 올 거야.'가 좀 더 실제 목적에 가까운 나만의 도파민 치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약간의, 크다 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음악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카페에 들어가도 소음제거 기능을 켠 이어폰을 끼고 주변과 유리되길 자청하던 나인데, 음악이 거슬린다는 것은 무언가 당혹스러운 현상이었다.
선택한 소음과 선택하지 않은 소음을 선택한다는 것의 경계선에서 전자를 못 견뎌 후자를 선택하는 상황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변 소음 혹은 고요가 참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편안함이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오후 늦게까지 울어대는 뒷산의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적당히 카페에 앉아 귓속에 파고드는 옆테이블 아줌마들의 수다가 싫지 않아 졌다.
영문을 모르겠던 변화의 한가운데서 여섯 번째 감각이 직관을 보내왔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내 안의 시끄러움을 마비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좋아. 온 감각을 후벼 파고들어 마비시키는 그 내면의 소음들이 언젠가부터 울음을 그치게 된 것이었다. 터져나가듯이 심장이 발작할 때 차키를 들고 뛰쳐나가야 하는 상황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모든 것은 일단 균형을 맞추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 그 역치의 것으로 마비시켜야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나에게 남아있지 않고 푸드덕 나를 떠난 무언가에 몸은 본능을 발동시켜 다시 적응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삶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매일을 점점이 연결해 악보를 그려낸다. 당장의 나는 그게 어떤 음악인지 인지할 수 조차 없이 우매하다. 단지 지금 드는 생각은 그 악보 음표마다 악센트를 그려 넣지 않고 싶다는 것뿐이다. 바라건대 오늘하루의 박자는 안단테였으면 좋겠다는 것.
아,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