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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서 Aug 28. 2024

이 광대한 하늘아래

사랑이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먼 곳이 있을까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셨다.


살면서 여러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 참석해서 슬픔을 나눴던 적은 있지만 2년 전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의 장례식은 딸인 내가 느끼기에도 참 특별했다. 코로나가 아직 기승을 부릴 때라, 우리는 부조가 적어 장례식 비용이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까지 했던 게 사실이었다. 엄마와 내가 빈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계신 손님들이 계셨다.


고모부와, 둘째 큰아버지. 고모가 아주 일찍 돌아가셨기에 기억에 없는 고모부 얼굴을 나는 단박에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이 없는 우리 집에 외딸인 나는 완장을 찰 수 없었는데, 조금 후에 도착하신 작은 아버지, 고모부, 그리고 가까웠던 사촌오빠가 자진해서 완장을 팔에 끼우고 손님들을 맞기 시작하셨다.


엄마와 나는 영정사진을 골라야 했는데, 미리 준비해 놓은 확대할 증명사진 한 장 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던지라 참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재치 있게 골라서 사진관에서 확대해 온 사진은, 아빠가 생전에 색소폰을 배우실 때 첫 공연을 끝내고 기쁨과 뿌듯함에 씰룩이는 입매가 장난스럽게 선한, 그런 사진이었다. 한분 한분 들러서 마지막 길 아버지의 얼굴을 보시는데 모두 각자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를 불러내듯 한참을 그 사진을 바라보셨다.


모인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던 때,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상주로 자리를 지키시던 고모부가 눈물을 떨구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형님, 살아생전 받은 사랑을 이제야 이렇게 갚으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아했다.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기도 했다. 우리는 생전 본 적 없었던 고모부와 우리 가족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차가 나가고 화성의 한 산자락에 자리한 추모공원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그 말에 담긴 시간을 고모부께 들을 수 있었다.


고모부는 육사를 졸업하신 직업군인이셨다. 고모는 어화둥둥 위로 줄줄이 달린 오빠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고명딸이었는데, 자가면역질환을 앓기 시작하시고 나서 근무지가 자주 바뀌는 고모부를 따라다니시며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근무지가 바뀔 때마다 아버지가 꼭 한 번씩은 고모부를 찾아오셨다고 하셨다. 밥을 사주시며 당시로는 큰돈이었던 이삼십만 원 정도를 꼭 챙겨 와서 상관들과 함께 밥도 먹고 그러라며 쥐어주고 가셨다고 한다.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가끔 조카들과 고모부를 찾아와 밥을 사주고 가곤 하셨다는데, 함께 마신 소주 한 병에 기분 좋게 취해 손을 흔들며 서울역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고.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세월의 일렁임을 가득 담아 우리에게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모르는 나의 아버지.


내가 딸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아버지란 사람은 진짜 어떤 분이셨을까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야, 내가 만들어놓은 한 사람의 프레임을 걷어내고 아빠는 진짜 어떤 사람이었을까 추리를 시작한다.


내가 곁에 두는 책 중에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의 깊이를 이해하기 어려웠어서 그나마 이해되는 앞쪽만을 반복해서 읽기 일쑤였는데,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난 뒤 그 책의 마지막 챕터인 ‘고별에 대하여’ 까지를 완독 할 수 있었다.


그 마지막 챕터에 이런 말이 나와있다.


“이 광대한 하늘 아래 사랑이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먼 곳에 있을까?

어떤 환상이나 어떤 기대나 어떤 추측이 사랑보다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아버지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원래 그의 이름대로 살아갔을 그 행적들을 그날 장례식장에서 들었다. 밤늦게 모두 모여 앉아, 큰아빠는 말이야, 내 동생이, 고모부는... 각기 다른 호칭들 속에 퍼즐처럼 맞춰지는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는 내게 참 생경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사랑해 마지않던 딸인 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영원히 사시겠구나. 나 또한 변함없는 그 사랑 안에 살겠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났다 할 수 있을 어느 날,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부재에 얼굴을 적시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엄마와 나의 식사시간에 더 이상 아버지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제 아버지를 보내드린 것 같다. 더 이상 슬픔에 잠식되어 휘둘리지 않게 되었지만, 불쑥 둘 다 시간이 함께 비는 쉬는 날이면 누구 할 것 없이 제안을 한다.


“우리 함백산에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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