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면 라디오를 듣는다. 최근에는 아침 9시부터 12시경까지 다니고 있는 대학교의 박물관 도서자료실에서 책을 옮기는 일을 하게 된 덕에 고정적으로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생겼다. 거대하고 조용한 책 더미 사이에서 홀로 몸을 움직이며 DJ의 목소리와 예상 할 수 없는 노래를 가득 듣는다. 하루 중 가장 생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노동과 휴식을 동시에 즐기는 나만의 시간이다. (나는 주로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듣는다.)
어느 날은 라디오에서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의 일부분이 들려왔다. 글 전체의 맥락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낭독된 부분은 바닥에 이면지를 가득 깔고 공룡을 그리는 시인의 조카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인은 조카에게 왜 그렇게 공룡을 그리는 거냐 물었다. 조카는 대답했다.
“공룡을 만날 수가 없어서 그리는 거예요. 그리고 있으면 꼭 만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공룡은 과학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구적 이미지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상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아련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아이에게 공룡은, 그리고 공룡을 그리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먹는지, 얼마나 거대한지 책과 영상을 통해서나 막연하게 보았을 공룡을 그 작은 몸으로 자신의 세상 속에 그려 넣는 마음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움.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은 흔히 자신이 경험했던 어떠한 순간, 시간, 공간, 사람으로 여겨지곤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리움이란 애타게 보고 싶은 아련한 마음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겪어본, 겪고 있는, 심지어는 겪어보지 못한 일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그리워할 수 있다. 필요한 건 오로지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관계에 있어서 그리움은 나에게 특별하다. 내 속에 유의미한 흔적을 남긴 사람과의 만남들은 매순간 그립다. 만났던 과거를, 만나고 있는 현재를, 만나게 될 미래를. 흩어짐도 똑같다. 헤어졌던 과거를, 헤어지고 있는 현재를, 헤어지게 될 미래 모두가 벌써부터 그립다. 만남과 헤어짐의 장면들을 떠올릴 때면 설렘, 기대, 떨림, 걱정 등 어떠한 감정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은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도달하게 된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김소연 시인은 말한다. 조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공룡을 만나고 있었다고. 아이는 그리워서 그림을 그렸고 나는 그리워서 글을 쓴다. 글과 그림은 ‘긁다’에 어원을 두고 있다. 긁는 행위는 어디든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아마도 ‘보고 싶은’ 마음을 ‘볼 수 있는’ 그림과 글로 치환 시켜 마음속에 그리움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잊고 살아가더라도, 만날 수 없어도 두고두고 다시 그리워할 수 있도록.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리고 그리다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