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이비 May 14. 2020

순간의 머무름

<바깥은 여름> - 김애란

  김애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은 건 중학교 2학년 때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인생>을 읽었을 당시이다. 그 때 읽었던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감탄하며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도 김애란 작가라는 이유로 믿고 덥석 샀다.


  역시 작가의 표현력이 가장 마음에 들어왔다. 일상 속의 작은 일들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서술하며, 정말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사실 장편 소설인 줄 알고 샀다가 단편 소설집이라서 당황하기도 했다.)


  작가가 이 소설들을 통해 어떤 숨겨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시 내용을 되짚어 보자. 작가의 말 중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작가와 내가 바라보는 곳이 평행하게 되지 않을까?


 소설은 총 7개가 실려있다.



<입동>


 아들이 유치원차에 치여 죽은 뒤로 아내가 가지는 무기력함을 바라보는 남편의 이야기이다.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도 쓰던 아내가, 아들이 죽은 이후로 복분자가 물든 벽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새로 갈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은, 작가가 시간의 이동과 회상을 통해서 이야이가 하나하나 풀리도록 잘 썼다는 것이다. 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전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있었는지 과거로 되돌아가다가 결국은 자연스럽게 나도 모르게 현재의 사건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끝낸다. 그 짜임이 놀라웠다.



<노찬성과 에반>


  이 소설은 후반부에 찬성이가 에반의 안락사를 위해 번 돈을 자신의 핸드폰에 쓰게 되고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부분이 계속해서 눈에 읽혔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용서'라는 말을 마지막에 찬성이가 떠올리며 스스로를 '용서'하려는 것인지 의미심장하게 서술된 것이 기억에 남는다.


p.43 돈을 벌기 위해선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인내가 무언가를 꼭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p.45 빛이 없어 자기 그림자를 갖지 못한 작은 개가 찬성의 손목 아래서 자꾸 소리 없이 짖어 댔다.

p.50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건너편>


반대의 상황에 놓여있는 이수와 도화의 연애 이야기이다. 정말 존재해있을 것만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라서 오히려 깊게 느껴지지 않았던 소설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실제 연애 상담거리의 이야기 같다고 느껴졌다. 서로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만 제 3자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결국 연인 사이의 갈등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p.86 '제철'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p.119 더이상 고요할 리도, 거룩할 리도 없는, 유구한 축제 뒷날, 영원한 평일, 12월 26일이었다.



<침묵의 미래>


  가장 깊고 현실비판적인 소설이라고 생각됐다. 현대인들이 언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사라지는 고어들과 그들을 모아둔 박물관에 대입시켜 상황을 표현해냈다. 그저 상상력과 현실상황의 어우러짐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한번 읽는 것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글. 이 소설은 언젠가 제대로 분석해보고 싶다.



<풍경의 쓸모>


  이 전체 책의 대표 얼굴을 하고 있는 글이다. 책의 뒷표지에는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라는 글과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라는 글이 나온다. 최근에 시간의 흐름은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데 우리는 그 속에서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마 김애란 작가는 한 시간, 한 공간, 한 순간 속에 붙잡힌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p.150 과거가 될 만반의 자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러곤 마음 속으로 숫자를 센 뒤 사진기를 보고 웃었다. ... 사진기는 펑! 펑!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p.155 두 눈을 가린 사람이 손끝 감각에 의지해 사물의 이름을 알아맞히듯, 아버지는 '선물'의 형식을 빌려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디를 더듬고 기념하려 애썼다.

p.173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려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리는 손>


  다문화 가정의 아이인 재이와 엄마의 이야기이다. 세상의 어두운 곳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스마트폰을 늘 쥐고 다니고, 어디서든 피할 수 없는 시선과 말을 마주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 주머니 속에서부터 24시간 불밝히고 있는 어두운 면들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p.194 각 시기마다 무지 또는 앎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큰 걸보면.

p,196 그게 나와 면식이 없는 신이라 해도.

p.214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제자인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도 누군가의 죽음과 그 순간에 붙잡힌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딱히 감흥있게 읽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Siri와 대화하는 순간들은 어느 소설보다도 나를 몰입시켰다.


p.228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은 새처럼 번번히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p.229 사람 얼굴을 보려면 자연스레 하늘도 같이 봐야 하는.

p.235 누군가의 상상을 상상하는 상상 안에 계산돼 있었다.

p.249 시작도 끝도 목적도 방향도 없는. 그러니까 배우자나 친구하고나 나눌 법한 시시한 이야기를.



  어쨌든 김애란 작가는 더욱 나를 팬으로 만들었다. 이런 작가들의 글을 읽고 나면 마음 속으로 문장들을 지어보고는 한다. 작가들도 이렇게 떠올리는 문장들을 모아모아 소설 하나를 완성하는 걸까 생각도 들고, 나는 언제쯤 소설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의 따뜻한 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