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by 레인메이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할 일 목록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손이 자동으로 휴대폰을 집었다가, 화면을 켜지 않은 채 다시 내려놓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동작을 의식적으로 끊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색했다. 마치 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서는 것 같았다.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감각은 남아 있는데, 가지 않기로 한 상태.




커피를 내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고, 원두 가루가 필터 위에 쌓였다. 평소보다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는데, 아마도 내가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일 것이다.

커피를 내리면서 동시에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그냥 커피만 내렸다.

그러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괜찮은 건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보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사실 그 마음 어딘가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다. 이게 휴식인가, 아니면 회피인가. 속도를 바꾼 건가, 아니면 그냥 멈춘 건가.

명명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이름을 붙이려 했다. 정당화하지 못하면, 이건 그냥 나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오전 창밖을 봤는데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급하게, 어떤 사람은 천천히.

나는 그들이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조금은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적어도 가는 곳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중'이었고, 그게 선택인지 포기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하루를 효용으로 채웠다. 오늘 내가 게으르지 않았다는 근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자격.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 그래서 하루가 끝날 때마다 점검했다.

오늘 뭘 했지? 뭘 끝냈지? 그 목록이 충분하지 않으면 불안했고, 충분해도 여전히 불안했다. 다음에는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따라왔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다. 그게 자유라고 느껴지기보다는, 공백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

이 감정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는 내게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물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뭐라고 해야 할까. '바빠'는 거짓말이고,

'한가해'는 초라하게 들릴 것 같아서,

결국 "그냥, 지내"라고 말했고

친구는 웃으며 "그게 제일 좋은 거지"라고 했다.


나도 웃어넘겼지만, 그 말은 나에게 축복이 아니라 유예 선고처럼 들렸다. '그냥 지낸다'는 게 제일 좋은 거라면,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한 걸까. 왜 이 대답이 변명처럼 들리는 걸까. 친구는 그게 좋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좋은 건지 아직 모르겠었다.




점심을 먹고 목적지 없이 산책을 나갔다.

그냥 걷고 싶어서 걸었다.

동네를 천천히 돌면서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봤다.

어떤 집 담벼락에 덩굴이 자라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관리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심었다가 방치한 것 같았는데 아름답다기보다는, 그냥 자라고 있었다.


어떤 가게 앞에는 자고 있는 고양이가 자고 있는 그 고양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아무 책임도 없이 그저 자고 있는 저 모습이 부러웠다. 그런데 동시에 생각했다.

저건 부러워할 대상이 아니다. 고양이는 책임이 없는 게 아니라,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뿐이다.

나는 책임을 내려놓으려 하면서도, 여전히 책임이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골목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했다가, 조금 더 듣다 보니 반복되는 리듬이 거슬렸다. 누군가에게는 배경음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배경음악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었지만, 어쩌면 이건 그냥 소음에 가까운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 하루가 끝나가고 나는 하루동안 아무것도 내세우지 못했다. 생산적이지 않았고, 효율적이지 않았고, 성취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가 비어 있지 않았다. 커피 내리는 시간, 창밖을 보던 시간, 산책하던 시간. 그 시간들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게 매일 반복된다면?

이 하루가 예외가 아니라 기본이 된다면?

나는 정말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나는 아직 아무것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도 몰랐다. 단지 지친 것일 뿐, 바꾼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밤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내일은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내일도 이렇게 보낼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라는 말이, 아직은 허락처럼 들리지 않았다. 변명에 가까웠다.

그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면서, 동시에 그 말의 무게가 가벼운지 무거운지 가늠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게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른 선택이었다. 이 선택이 나를 살릴지 줄일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하루, 커피를 천천히 내렸고, 산책에서 돌아온 뒤 다리가 조금 무거웠고, 지금 이 침대 시트가 차갑다는 것. 그 감각들만큼은 실재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하루였지만, 적어도 이 감각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걸로 충분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하루는, 그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