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
<...내가 산중에서 사는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직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어떤 틀에도 갇힘이 없이 내 식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스님의 수필집에서>
塵勞逈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번뇌를 멀리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기에 새끼줄 머리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흐드러지게 공부할지어다.
살다가 보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자신의 상황이 폐쇄적이고 미래 또한 불투명할 때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스무 살 후반 무렵에 이런 시기가 왔다. 천구백 팔십 년도 후반. 그때 나는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다. 내 직장 생활의 첫 발령지는 순천이었다. 그곳 순천은 나를 기꺼이 맞아 주었지만 사실 나는 거기에 부응할 힘이 부족했다. 새로운 출발이라 함은 용기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지만 연약한 사람에게는 불안함이다. 혼자서 맞는 그 해 순천에서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퇴근하여 돌아온 하숙방에는 남동쪽을 향해 조그맣게 뚫린 창문을 통하여 얼어붙은 별빛 몇 개가 들어오는 겨울밤의 정경이 전부였다. 나는 그 방에서 순천에서의 첫겨울을 보냈다.
그 시절 내게 위안이 있었다면 퇴근해서 돌아와 소설을 읽는 일이었다. 물론 소설을 읽는 것이 폐쇄적이고 암담한 상황을 호전시켜주지는 못했지만 그 일이 나에게는 조그만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소설이었는데 나는 거기서 문득 소설에도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소설 속의 힘이 추운 그 해 순천에서의 생활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휴일이면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지기 이전에 다녀올 수 있는 조계산행이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인근 승주군에 있는 조계산은 조계종의 승보사찰 송광사와 천태종의 선암사, 그리고 천년의 세월을 묵묵하게 지내온 쌍향수가 향내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천자암이 이 계곡 저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산이다. 나는 산길을 따라 그중 송광사를 다녀오고는 했다. 때때로 송광사 초입에서 계곡물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건너 왼편 산길을 오르기도 했다. 그 산길을 따라 오리 정도 걷다 보면 푸른 대나무 숲 사이로 조그마한 암자가 눈에 보인다. 그곳이 내가 조계산행에서 위안을 받는 장소였다.
불일암이라 불리는 암자는 동남향을 하고 있고, 앞은 조계산의 조망이 한 눈으로 들어와 시원함을 감상할 수 있다. 암자 앞 작은 텃밭 너머로 정갈한 대나무 숲은 운치를 더해서 암자에 들어 선 순간 녹색의 향연에 젖는 듯 착각이 든다. 암자는 본체와 부엌이 딸린 요사체가 아담하게 이웃해 있고, 본체 옆에는 잘 정리된 장작더미가 한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우물로 가는 길 옆 잔디에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라는 팻말이 앙증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자못 위엄을 뽐내듯 조그만 키를 보여 주고 있고, 본체 왼편 처마에는 편액이 있고, 거기에는 한글로 쓴 소박한 글씨가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이렇게.
그 해 겨울의 짧은 해를 받고 서 있던 불일암을 그날 처음 다녀온 이후로 나는 몇 번을 더 다녀왔을까. 아마도 여서 일곱 번 정도는 다녀왔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이후 이, 삼 년 동안에 말이다.
나는 암자에 법정스님께서 머무르며 생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임암에 세 번째 들렸을 때였을까, 나는 그때 스님을 처음 뵈었다. 스님은 자신의 거처를 무례하게 찾은 젊은 방문객에게 다감했다. 무례한 젊은 방문객의 인사에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맞아주었다. 그날은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젊은 방문객도 암자를 내려왔다.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스님이 부엌에 손수 써서 붙여둔 글귀였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나는 스님의 자필로 적힌 이 글귀를 읽으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식에 대한 경외와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소박한 암자, 여기의 주인이 하루의 해를 살아가는 그 삶의 방식이 던져주고 있는 까닭 모를 파문이었다.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그날 이후로 불일암이 잊혀지지 않았다.
봄이 왔다. 다시 찾은 불일암에서 스님을 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스님은 장부의 기상을 그대로 간직한 장년의 짙푸른 소나무 같다는 느낌이었다. 뜨겁고, 냉철하며, 정확하여, 빈틈없는 풍모 안에서 다사롭고, 여유로우며, 든든한 그늘이 느껴졌다. 나는 부끄럼 없이 스님의 그늘 아래로 들어섰다. 어쩌면 귀찮을지도 모를 낯선 젊은 녀석의 응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내 손에 스님은 이런 말씀을 쥐어 주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늘 생각하도록 하게나. 이쪽의 입장만을 주장해서는 갈등만이 있을 뿐이라네.”천구 백팔십 년. 내 갓 이십 대를 섧고, 슬프고, 아프게 한 광주민주화물결을 때때로 불면증처럼 떠올리곤 하던 그때,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간 대학생활에서는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교련집체교육거부를 하고, 그로 인한 영장과 낯선 군대 생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권력을 향유하는 자와 소외된 자, 정의를 먼저 품을 줄 아는 자와 자신의 안위를 먼저 꾸리는 자에 대한 그 이분화된 분별에 짓눌려 우왕좌왕하던 청춘, 그래도 야심을 놓지 못하고 종내는 아쉬워 꼭 공부를 해서 사회 속으로, 속으로의 항해하겠다던 치기 어린 욕망, 생각해 보면 암울하고 폐쇄적이며 불투명했던 그 많은 것들은, 그때 스님께서 손에 쥐어주신 그것 속에 어떻게 용해되어 갔을까.
초겨울이었다. 스님께서 손수 깎아 준 배는 시원하고 단맛이 깊이 베여있었다. 배가 맛있다는 내 말에 스님께서 왈. “암. 배로 배를 채워야지.” 암자 앞뜰 대나무의 청정함에 대나무가 눈이 부시게 푸르다는 내 말에 스님께서는 또 이렇게. “대나무에게 고맙다고 하게나.” 그 시절 나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어두웠다. 스님의 말씀을 대충대충 하듯 놓쳐버렸으니 말이다. 왜냐하면 스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양귀가 콕 막힌 젊은 녀석 때문에 안타까우셨던지 종내 심기가 편치 않는 음성이었으니까. 나는 주섬주섬 내 그림자만을 챙겨든 채 서둘러 인사드리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벽창호가 따로 있으랴. 내 우둔함은 이렇듯 내가 잘 헤아리지도 못했으니.
초여름이었을까. 그날은 보슬보슬 이슬비가 내렸던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불일암을 찾았다. 그날은 그가 나를 동행해서 불일암에 가게 된 것이다. 그는 친구였다. 오직 공부를 통해서 사회로 향한 야심 찬 항해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혈기왕성한 그와 나였다. 친구는 사회 속으로 항진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보다 치열했던지 몸이 많이 안 좋았고, 나는 그저 여전히 우둔했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즈음 친구는 이미 산문(山門)으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을 굳혀가기 시작한 때였고, 나는 그것을 전혀 모른 상태였을 뿐이었다. 법정스님께서는 출타 중이었다. 요사체에서 인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스님 한 분이, 해맑은 얼굴의 스님이 이슬비에 젖은 우리를 반겨주었다. 친구는 허물없이 그쪽 스님께 인사를 했다. 불일암의 공양주이신지, 아니면 상좌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시는지, 맑은 미소에 해밝은 눈빛의 젊은 스님은 법명이 덕현이라 했다. 친구와 덕현스님과는 깊고 어려운 대화가 이어졌다. 방 한쪽 서안(書案) 위에 펼쳐져 있는 경서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다. 나는 비로소 친구의 진면목을 보는 듯했다. 친구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 나는 머지않아 친구가 속세를 떠나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직감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친구의 몸에서 향내가 났던 걸까. 불일암으로 올라오는 내내 친구의 몸에서는 향을 사르는 내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덕현스님과 친구의 대화에서 소외되고 있을 즈음 스님 한 분이 올라왔다. 스님은 법명이 덕문이라고 했다. 속가의 나이로 치면 네 사람 모두 동갑, 아니면 그저 한 살 차이리라 생각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이슬비가 멎어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으나 어떤 말도 물어보지 않았다. 암자를 내려오는 길 내내 또다시 친구의 몸에서 느껴지는 향불의 아릿한 기운이 코를 두드리다가 이내 눈앞을 가로지르며 아른거린 듯했다. 눈물이 번져 오르고 나는 조금 서러움이 느껴졌다. 친구는 머지않아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떠나리라.
入此門萊 莫存知解라.
풀이 웃자라 오래도록 묵혀졌으나 예전부터 있던 바로 그 문을 오늘내일 미루다 이제 들어왔으니, 내가 이 문 안으로 들어와서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세간의 알음알이로 해석하지 않으리라. 이제부터는.라는 말을 남기듯이 홀연히 떠났다. 친구는 그렇게 세간을 떠났다. 그때가 천구백팔십 년대 말 무렵이었던가. 몇 년이 지나 나는 한 시절 친구였던 그를 정보스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천십 년 삼월 십일일 오후 두 시가 가까웠을 때 어떤 뉴스 속보를 접한 옆 동료가 말했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데요. 나는 일손을 멈추고 인터넷의 속보를 읽어나갔다. 법정스님 열반. 상좌스님들 스님의 유지 따르기로. 우리 시대의 무소유스님. 청빈한 삶을 실천한 법정 대종사.
길상사 경내의 길상초와 나무들에게 먼저 달려오곤 하는 빛깔 고운 계절들을 생각하던 나는, 이천 칠 년인가 팔 년, 그 어느 날, 아내, 아이들과 함께 길상사 경내의 길상사 주지스님의 사진전을 관람하기 위해 갔다. 그곳에서 법정스님을 뵈었다. 스님의 천식기가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재가 불자님들 사이에서는 간간히 스님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해 깊어가는 계절 하나가 햇살을 받고, 조용하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석조관음보살님상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경내의 길상초님들에게 속삭이듯 소식을 주고 있었던 것일까. 이제 이번 계절 하나도 깊어가는 중이란다.
倒却門前刹竿 誰傳迦葉金襴
雖然松檜滿山 幾人能見歲寒
문 앞의 찰간(당간지주)대를 쓰러뜨렸거늘 누가 가섭에게 금란가사 전했으리. 비록 소나무와 전나무가 산에 가득하다지만 그 몇 사람이 겨울에 추웠음을 알 것인가.
아상(我相)과 교만함으로 가득했던 아난존자는 가섭 존자가 이렇게 말한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아난아, 문 앞의 찰간을 꺾어버려라(倒却門前刹竿).” 이후 칠일동안 용맹정진을 한 후에야 비로소 가섭 존자의 참마음을 알았다. 이십 오 년 동안 부처님의 중요한 법문을 다 들으며 시봉 했던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야말로 금란가사를 받을 자격이 있고, 더군다나 부처님 사후의 경장(經藏)을 송출하는데도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교만심을, 아상을, 부셔야 할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마침내 그 찰간을 꺾어버림으로써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얻었던 것이다.
수행자의 도리란 무릇 이리해야 한다. 많이 듣고 많이 아는 것이 불교공부가 아니다.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마음속의 찰간을 꺾어버려야 한다. 역대 선지식들이 모두 이러하다(能見歲寒) 하지 않던가.
다비장을 마치고 스님의 유언을 발표하는 덕현스님의 얼굴에서 나는 가섭 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십 년도 더 지난 그 시절, 내가 불임암에서 뵈었던 법정스님의 모습과 함께. 덕현스님은 당간지주를 꺾어버리고 들어오는 아난존자를 바라보는 가섭 존자처럼 은사스님의 유언장을 표현하게 접었다. 나에게 그 모습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스스럼없이 아난존자에게 쥐어주던 가섭 존자가 다시금 아난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난아, 문 앞의 찰간을 꺾어버렸구나. 마침내 꺾어버렸구나.
卽時現金 更無時節이라고 할(喝)을 하시던 불일암시절의 법정스님.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고 이르셨던가. 하나 지금이 그때임을 여전히 우둔하여 놓치고 있는 나는 아, 부끄럽고 부끄럽다. 바로 지금! 지금 뿐이라는 것을 내 언제나 부끄럽지 않게 맞이할 것인지. (2010.3.19. 메모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