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도록

세상의 중심에 나를 놓는 방법

by 꽃비내린

나는 유독 침묵이 길어지는 것에 초조해했다. 둘 사이의 공백이 어색한 사이임을 보여주는 거라 여기며 말이다. 그래서일까. 모임에서 가장 어색하고 대화가 끊기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공백을 메꾸려 했었다. 당황하는 마음을 감추려 웃음으로 밀어냈다.


연락 문제에서도 그랬다.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다 던진 물음에 대답이 없을 때, '내가 잘 못 말했나', '재미없는 얘기였나'처럼 대화가 끊기는 이유를 상대가 내린 평가로 느꼈다. 이 상황을 반복해서 겪으면 연락하기 망설여졌고, 이내 대화를 이어가길 그만두곤 했다.


최근에 SNS에서 통제감에 대한 글을 봤다. 그 글에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이다. 삶에서 벌어진 일들을 바꾸긴 어렵다. 머피의 법칙에서 말하듯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에 후회하고 원망해도 변하는 건 없다.


인식을 바꾼다는 건 벌어진 일에 대해 관점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가령, 침묵이 길어지는 상황에 대해 나는 '어색한 사이임을 드러난다'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에 앞선 생각의 뿌리를 찾아보면 '대화가 끊기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긴 관점이 자리 잡혔던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알았다면 그다음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지 찾아본다.


스스로 하기 어렵다면 주변 친구나 지인(특히 다른 성향을 가진)에게 물어본다. 요즘엔 AI챗봇도 잘 되어 있어서 인지행동심리학 관점에서 질문해 달라고 하면 된다. 침묵은 어떤 이에겐 편안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 여길 수 있다. 여러 관점을 알게 될수록 자신이 얼마나 고립된 생각에 빠졌는지를 알 수 있다.


불행에 잠식된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두고두고 그 기억에 매달리고 만다. 겉으론 그 상황을 겪지 않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면 깊은 곳엔 그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던 나 자신에 대한 미움에 가깝다. 부모님의 이혼이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없다고 여겼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삶은 바뀌지 않았는데, 나만 생각을 바꾸라고?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

예전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불행을 기어이 끄집어내어 씹고 삼켜서 맞서지 않으면 지는 거라 생각했다. 그때는 그게 불행에 굴하지 않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었던 어린 나에게 원망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불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스러웠던 그날의 자신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구원이나 사랑으로 해결해 줄 순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요즘 나는 답장이 오지 않는 메신저에 초조해하지 않는다.

나는 물음을 던질 순 있지만 답장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상대의 몫,

나는 기대를 할 수 있지만 그에 응하는 건 상대의 선택이란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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