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개와 책방 주인
설 연휴에 묵호로 향했다. SNS에서 화제가 돼서 많은 이들이 당일치기로 떠나는 이곳, 묵호로 말이다. 묵호는 먹 묵자에 호수 호자를 써서 검은 호수를 말한다. 바다가 깊어 물이 어둡고 까마귀가 많아지었다는 설과 글 잘 짓는 선비가 나는 마을이라 해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SNS에서 보인 묵호의 모습은 잔잔한 바다 마을에 가까워 푹 쉬어가기 좋을 거라 기대했다.
여행 전날 날씨를 확인하니 둘째 날에 눈비 소식이 있었다. 숙소가 동해역 근처라 첫날은 동해 주변을 둘째 날은 묵호에서 보내려고 했었는데 차질이 생겼다. 망했다. 첫날 묵호에서 최대한 볼거리는 다 보고 오고, 둘째 날은 카페에서 푹 쉬는 걸로 노선을 바꿨다.
첫날은 날씨가 좋았지만 안개가 뿌옇게 내려앉아 바다가 흐렸다. 반짝이는 해변은커녕 특색 없는 거리를 걸으며 '이게 맞아?'라는 말을 연심 거듭했다. 이번 여행은 망했구나 싶으면서도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 마을을 둘러보고 논골담길로 향했다. 약간 울적해지던 순간에 도로 건너편에 올라가던 흰 개와 마주쳤다.
목줄도 없이 돌아다니는 개였다. 흰 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으악. 나는 개를 바라보는 건 좋아하지 가까이 있는 걸 무서워한다. 더군다나 좀 큰 중형개였다. 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뒤에서 개의 헥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굳어서 차마 고개를 뒤로 돌진 못했다. 무시하고 걸으면 흥미를 잃고 가겠지 싶어 쳐다보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따라오는 소리가 사라졌다. 이제 갔나? 카메라를 켜고 뒤쪽을 비췄다. 다시 헥헥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흰 꼬리가 흔들리는 걸 봤다. 제발 이제 그만 따라와. 너한테 줄 거 없어.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중년 아저씨 두 분이 나와 뒤따르던 개를 보더니 '개가 아가씨 따라가네' 했다. 제 개가 아니라고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자 굉장히 창피했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자 한 커플이 차량에서 내리고 있었다. 커플 중 남자는 개를 보더니 '어, 아까 봤던 갠데'하며 이리 와하고 불렀다. 두 사람이 흰 개의 진로를 막아서고 나서야 개의 관심도 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개와 나의 추격전은 일단락했다.
묵호에서의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숙소에서 체크아웃하고 나설 즈음에 눈비가 섞여 내렸다. 서울보다 더운 날씨에 땀 뻘뻘 냈던 어제와 다르게 기온이 툭 떨어져 춥고 바닥은 축축했다. 밖에 있다간 얼어 죽을 것 같아서 가장 가까운 책방을 향했다. 오픈시간을 조금 넘겨 들어가니 책방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많이 추우시죠?"
"네, 눈이 내려서 힘들었어요"
묵호 여행이 처음인데 날씨 운이 안 따라줬다고 덧붙였다.
"묵호는 날이 따듯한 편이라 눈이 드물어요. 이렇게 함박눈으로 내리는 건 올해가 처음이에요."
오 그래? 오히려 운이 좋잖아.
"오늘까지만 트리 놔뒀다 넣으려 했거든요. 오늘 딱 눈이 내렸네요"
그에게 있어선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작년부터 여행에 가면 꼭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오겠다고 결심했었다. 이번 묵호 여행에서 담고 싶은 이야기는 묵호의 책방주인이었다. 주인의 취향에 큐레이션 된 책들, 그리고 책방주인의 코멘트들이 재밌었다. 여기서 두 가지 책을 발견했는데 그중 '마음예보'라는 책의 소개글이 마음에 들어 읽고 있다.
어떤 이에겐 아쉬운 일이 누군가의 특별한 경험일 수 있음을 알게 된 여행이었다. 책방에 찾아올 다음 여행자를 위해 쪽지를 남긴다.
+ P.S.
보관한 짐을 찾으러 묵호소극장에 갔다. 한 남성이 우쿨렐레를 들고 연주하고 있었고 보관소 앞에는 카메라로 촬영중인 것 같았다. 들어가도 되나 망설이는 차에 '들어와도 돼요' 하고 남자는 말했다. 알고보니 소극장 직원분이셨다. 우쿠렐레를 배운지는 3년 정도 지났고 퇴근 후에 종종 연주하는 영상을 찍는다고 하셨다.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잘 치시는 것 같다고 말하니 설날 동요를 부르며 연주해주셨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오우 당황스러웠지만 유쾌했다. 이제 가겠다고 하니 작별 노래로 마무리하는 센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