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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하지만 멀쩡하지 못한 날들

투덜거림과 불평

by 사랑의 천문학

최근의 삶이 국내 주식장 같다. 뭐 하나 시원하게 되는 게 없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마냥 나쁘기만 한 피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무엇보다 다행히도 직업이 있다. 그 직장으로의 출근길이 지옥 같고 앉아 있는 시간의 괴로움이 크지만 몇 년 전 최업 준비를 하던 시기의 고통보다는 훨씬 낫다. 최악의 시기에 느꼈던 가장 아픈 현실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지금을 감내하는 게 옳은 건가 싶지만, 다른 선태지도 없다. 이런 현실에 어딘가에 내 자리 하나는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한 일이다. 그 자리를 통해서 먹고 살 방도를 어찌어찌 마련하고도 있다. 얼마 전 시간이 남아 표를 하나 만들었다. 내가 가진 자산 총액이 서울 평균 집값과 1억 미만의 차이를 보이게 되면 자동으로 '퇴사 준비'라는 메시지가 튀어 나오는 엑셀 수식이었다. 대략의 계산으로 아직 개최지가 정해지지 않은 월드컵들 몇 번을 더 봐야 하는지도 모를 아득한 차이기는 했다. 저 수식이 작동하는 날이 올까 싶지만, 우선은 적은 돈이라도 벌어두는 수밖에 답이 없다. 그러니 일자리가 없던 지난 날들보다는 낫다고 나를 위로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다니고는 있는데, 삶이 때때로 버겁다. 어딘가 고장이 나버린 느낌이 종종 든다.


최근에 많이 되뇌이는 생각은, 자연 과학이 아닌 사회 과학의 영역에서 예외없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다. 예외는 없다고 믿는 사회 과학 원칙은 우매함이고, 예외를 고려치 않은 사회 과학 이론은 불완전이다. 식견도 없는 주제에 이리도 거창한 이야기를 주저리 하는 건, 과거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반드시 행복해지진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누가봐도 명백했던 문제가 해결이 돼도 다시 새로운 과제가 산적된 현실을 마주쳐야 했다. 해결된 문제는 다른 어려운 삶의 숙제로 파생되어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최대한 나의 투덜거림에 명분을 애써가며 주입하는 셈이기는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버거운 삶인 건 어쩔 수가 없다. 누군가는 더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게 나의 현실의 어려움을 경감해주지는 않는다. 아니, 나는 다른 사람의 곤궁함으로 나의 현실을 위로하는 게 되려 더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의 절대치의 수준이 매우 낮음을 날마다 실감하는 중이다. 행복의 존재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분명 실존하는 감정이다. 행복이 세상에 부재했다면 내가 그 순간의 감정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에 대해서 머리가 새하얘지는 날들이 다행히도 꽤 있었다. 그러니 행복이 존재하는 건 맞지만, 그게 너무 잠깐이다. 삶이 대체로 통증과 더욱 친하다. 그게, 벅차다.


원래 세상이 어렵고 인생은 버겁다고 한다. '원래'라는 말이 참 고깝게 느껴진다. 아직은 그래도 어린 편이라서 그런가. '원래' 그렇다는 말로 수많은 부조리함과 괴로움을 마냥 참고만 살아야 하는 게 꽤나 불합리하다. 물론 직장이 힘들다. 돈만 벌어서는 안 되고, 돈이 돈을 벌 수 있을 만큼까지는 벌어야 이후에 돈을 벌지 않을 때도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돈벌이를 하고는 있는데, 직장 생활이 쉽지는 않다. 삶의 과제는 또 너무 많다. 남의 경조사들을 챙기다 보니 어느새 나도 경사의 이야기가 오고 갈 때가 됐다는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게 혹시 잘 되면 이후에는 육아의 문제도 생길 것이다. 당연히 이 버거움의 원천에는 경제 활동이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나를 기특하게 여긴 누군가가 돈다발을 던져 주어 그 모든 경제활동에서 일거에 해방이 된다고 해도, 과연 나는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 행복을 느낄까? 아니다. 최근 느끼는 삶의 회의는 이런 구체적 행위들의 어려움과 버거움에서만 기인한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언제나 적자일 수박에 없는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부조리한 정언 명령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수단이 적당히 제 일을 한다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단기간 기분이 좋아질 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삶 전체로 봐서는 여전히 우울과 분노 그리고 무기력이 더 클 것만 같이 느껴진다.


어차피 질 경기에 죽어라 뛰고 있는 느낌이다. 경기를 뛰는 사람이야말로 이 경기의 향방이 누구보다 눈에 잘 보이는데, 정작 관중들과 코치들은 내게 열정과 패기가 부족하다며 꾸짖기도 한다. 그들이 옳을 수도 있다. 어쨌든 경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계속 진행 중이니까. 그러나 막막한 현실을 앞에 두고 뛰어야 하는 선수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는다. 지친 상태다. 몇 년 전 번아웃이 다시 찾아온 정도는 아니지만, 지쳐버림은 만성이 되었다. 그러다 드는 생각은, 스스로조차 내 삶에 동기부여를 못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세상 모두에게 힘든 일들이 있을 테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나처럼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지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멀쩡하게, 그런가보다, 하면서 살 수도 있을 텐데, 왜 나만 유독 이렇게 깊이 앓고 예민한가라는 생각이 꽤나 많이 든다. 예민의 유의어는 세심함이고 그러니 나는 조금 더 많은 걸 느끼고 헤아리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위안을 애써 가져보려고도 하지만, 그것보다 이제는 조금 편해지고 싶다. 공부를 했고, 대학을 갔고, 직장을 가졌다. 목표가 아닌 목적지였다. 항해의 의미라기보다는 매뉴얼에 맞게 노를 저어 '도달'만 했을 뿐이었다. 나의 노젓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삶을 대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지치는 와중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것에만 애를 쓰는 게 아니라 조금은 더 무탈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멀쩡하지만, 그리 멀쩡하지는 못한 날들이다. 명절이든 어디든 사람들을 만나면 잘 살고 있어 보인다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조금의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부모는 나보다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다. 그러니 그리 어리다고만은 할 수 없는 나이에 삶이 행복으로 충만하다고 느낀 적 없으니, 이건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같은 믿음일 테다. 삶은 분명 불행에 더욱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져있음에 오래 익숙해져 있는 잠깐의 요동침은 있어도 삶이 그리 즐겁지 않다. '그래도 살아는 볼 만한 인생'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날이 있을까 싶다. '포기'라는 선택지를 인생의 출렁임마다 떠올리지 않는 삶을 동경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래도 아무 생각도 없는 '무탈함'만이 가득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다. 평범한 현실을 영위하기 위해서 수면 아래서 무수히 많은 물장구를 지금처럼 계속해도 되니,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면 별일은 없고 무탈은 하겠다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멀쩡함'이라는 단어를 조용히 응시하게 된다. 참 어렵게나 획득할 수 있는 소박한 가치다. 언젠가는 나도 멀쩡함을 자연스레 품에 안아보는 날이 올까. 그때가 되면 현실이 조금은 살만한 날들이라고 생각될까. 그냥, 버겁다. 그래도 이 나이에 마냥 버겁다고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것이 민망은 하여, 이리도 장황한 변명을 길게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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