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예찬
손 쉬운 포기들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모든 포기들이 쉬웠을 거라 단정짓는 건 사려깊지 못하다. 때론 포기는 용기의 동의어다. 미련은 필연이다. 미련은 또한 관성이다. 성취를 위해 힘썼던 것보다 더 큰 힘을 가해야 비로소 멈춤이 가능하다. 커다란 아쉬움을 연민은 해도 동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니 포기는 아프다. 살면서 원하게 되는 게 참 많고,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욕구들은 생이 걸어온 역사의 반영이다. 과거의 흔적과 행적이 없다면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 역시도 쉽지 않다. 단순히 '집'이 필요하다는 의식주를 충족하기 위한 필요와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한 욕구의 층위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느끼게 되는 건 희망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걸 얻거나 성취하면 더 나은 기분과 안정을 느끼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희망은 지난 날들의 시간을 통해 잉태된다. 그 시간동안 느꼈던 환희와 결핍이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도록 추동하는 것이다. 얻거나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쉽게 혹은 거저 가져지는 게 아니다. 포기는, 이렇게 어렵게 얻은 삶의 동기부여를 스스로 마감해야 하는 일이다. 힘겹게 얻어낸 목표일 수록 포기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어떤 포기들은 충분히 헤아려지고 존중받아야 할 이유다.
포기의 사유들 역시 개별적이다. 당연히 현실이 뒷받쳐주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꿈은 소중하지만 그 꿈들의 성취는 차등적일 수밖에 없는 게 뻔뻔하게 부조리하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현실이다. 처리될 희망의 수에 비해 현실의 자원은 제한적이다. 누군가의 성취는 누군가의 좌절일 수밖에 없다. 좌절의 누적은 절망을 야기한다. 사람이 가장 힘들 땐 좌절 그 순간이 아니라 '퇴로'가 없다고 느낄 때다. 현실이 지옥 같은 건 물론 괴롭지만, 지옥 같은 현실을 어디로도 도피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절망이 찾아온다. '포기'는 절망에서 헤어나올 어쩌면 유일한 수단이다. 절망과 몰락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도피란 비겁함이다. 그러나 비겁함은 비열하고 겁이 많다는 의미인데, 어떻게든 나를 살리겠다는 마음에 '비열'이라는 단어로 명명하는 건 꽤나 가혹한 처사다. 좌절의 연속에서 미래에 대해 겁을 내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다치면 얼마나 아픈지는 다친 사람만 안다. 다친 곳을 다시 다쳤을 때의 괴로움 역시 그 사람이 누구보다 잘 느낀다. 이루지 못한 무언가가 있더라도 우선은 다치고 싶지 않는 마음부터 드는 게 잘못일 리 없다. 누구보다 먼저 지켜야 할 사람은 스스로다. '포기'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편할 리 없다. 미련과 아쉬움 혹은 회한이 단 조금도 없는 채 후련하기만 한 포기가 과연 세상에 있을까. 그런데, 꿈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게 더 스스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기에 포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유기되는 꿈보다는 지쳐버린 당사자에 대한 위로가 선행돼야 한다.
포기들에 대한 온정적 시선이 사회 전체의 동력 저해를 가져올 수 있지 않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매정하고 비정해 보이지만 세상에 정답은 없다. 포기된 것들의 무덤의 높이가 마천루가 되어도 결국 그 안에서 성공된 도전이 세상을 나아가게 한다는 명제도 마냥 틀리진 않았다. 틀리지는 않았기에 포기자들은 때떄로 비겁하거나 나약하다는 비난을, 또 때로는 겁쟁이라는 조롱을 받아야 했다. 거시적 관점에서 사회를 운영하는 측의 시선 만큼이나 한 명 한 명 사람에 마음을 맞추려는 노력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구성원들의 총합인지 그 이상의 가치가 함의된 공간인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까지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별적인 통증과 괴로움이 사회 전반의 무기력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거창한 사회적 효용 개념까지도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그저 강조하고 싶은 건, 사회 전반의 운영과 나아감만큼이나 개별적 생의 살아감도 충분히 유의미하다는 진실이다. 적극적인 도전의 문화를 만드는 것과 어려웠던 포기를 안아주는 일이 꼭 양자택일일 필요는 없다. 따뜻하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탤 능력과 힘도 없을 뿐더러 타인에게 나는 많이 무관심하고 애정이 없다. 그러나 살면서 포기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게 너무나 내겐 대안이 없던 순간이었음에도 타박과 훈계를 들었던 경험의 아픔이 아직 저밋할 떄가 있다. 세상엔 분명, 쉽지 않은 포기들도 있음에도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건 노력은 임의의 순간에 우리를 언제나 배신할 수 있다는 서글프면서도 종종 외면되는 아픈 현실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노력도 배신한다. 아주 어릴 때, 나는 학교에서 좋아하는 좌우명 등을 이야기 하며 "진정한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라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그땐 분명 그렇게 믿었다. 저 정언명령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진정히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따라오지 않을 땐, 내 노력의 진정성을 스스로부터 평가절하했다. 그런데 분명 진정하기만 했던 스스로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결과가 따라오지 않을 때가 이후에도 생겼다. 그러니까, 노력은 노력이고 성취는 성취인 셈이었다. 물론 노력의 진정성이 둘 사이의 가교가 되어줄 수는 있다. 그런데 성취되지 못한 노력은, 즉 배신당한 노력은 언제나 진정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 너무나 진정했던 노력도 모질게 배신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끌 거라는 믿음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 노력 또한 배신할 수 있는 현실임을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다. 이 현실에 대한 부정이 왜곡된 노력 신화를 파생시킨다. 노력은 충분히 배신할 수 있고 누구나 노력에 배신당할 수 있다. 포기는 노력의 배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애써 지키는 하나의 소중한 방안이다. 좌절들에도 노력하는 용기가 있다면, 좌절들에 끝내 소중함을 놓아버리는 포기의 용기도 있는 것이다. 이 서글프고 아픈 선택에는 책임 없는 비난이 주가 되는 게 애석할 때가 많다.
마음 아픈 포기를 따뜻하게 바라보자는 게 더 이상 아무 열정과 혁신이 없는 무기력한 공동체를 찬성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포기'를 바라봐왔는지에 대해서 성찰해보면, '포기의 행위자'에 대해 나약하다거나 충분히 노력을 안 했을 거라는 따가운 시선이 정말 없었는지에 대해서 그런 적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다. 당장 나 역시도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봤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포기를 하였을 때 받았던 시선들을 통해서, 때론 전후사정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우선 나를 찌르는 말들이 참 아팠음을 깨닫게 되었다. '포기'가 '예찬'까지 받아야 할 무언가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루고자 하는 꿈이나 얻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다. 본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존중과 예찬이 주어져야 마땅하다. '포기'란 끝나면 안 되고 끝나지 않을 삶에 다음을 부여하는 하나의 소중한 계기일지도 모른다. 무분별하게 남용되지 않고 신중한 숙고 끝에 이루어진, 절실하고 간절했던 무언가에 대한 가슴 미어지는 포기들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품에서 위로와 애도를 받기를 바란다. 지친 마음을 쉬고 잊혀야 할 절실함도 묻으며 좌절의 한 순간의 통증이 아주 극심해지만은 않기를 소원하는 마음이다.
안 그래도 아픈 실패고, 좌절이고, 절망이다. 쉽게 내지른 포기가 아니라, 그 뜨거운 열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사람'이다. 아팠던 포기가 위로됨으로써, 그 사람이 어딘가에서라도 지난 시간을 쏟아내며 맘껏 울고, 아파하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