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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한 지옥

밍기뉴,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by 사랑의 천문학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한 사람을 끝내 무너뜨리는 건 하나의 큰 불행보다는 작은 절망들의 누적이라 생각한다. 희망의 무소용을 비로소 절감하는 순간만큼 아픈 게 없다. 부질없는 기대라고 무딘 게 아니다. 이뤄질 수 없던 희망은 결국 스스로를 아프게 찌른다. 못된 지옥에 체념하지 않고 지옥을 애써가며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젠가는 이 시간이 끝날 거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뿐이다. 그 희망에 치열히 도전했지만 다시금의 암담함만이 되풀이될 때 한 나약하고 연약한 생이 지옥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점점 소거된다. 이런 경우, 서글프게도 지옥을 집이라 여기거나 지옥조차 없는 세상을 꿈꾸게 되는 수밖에 없다. 모든 희망의 문이 방화되어 연소됐을 때, 나의 경우는 후자를 갈망했다. 다만 그 세상을 지우려는 수단의 고장이 우연히 겹쳐 아직도 살아는 있다. 애써 잊었는지 일을 수밖에 없었는지 모를 그 시간을 거쳐 어쩌면 덤일지도 모를 삶을 살고 있는 지금도, 나는 사는 게 정말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다. 한 커다란 사건이 교훈적인 깨달음을 가져오는 게 필연은 결코 아니라는 증거다. 나는 여전히 종종 아프고 괴롭다. 아직도 그 자리에 고여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그러려니'가 잘 되지 않는 성격인 게 퍽 성가실 때가 있다. 모두가 비슷하게 아프면서 산다는 거창한 진실이 나를 위로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다. 타인의 고통으로 내 생채기의 통증을 달래고 싶지가 않다. 그냥 스스로가 멀쩡하고 싶다. 그나마라도 지옥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지금에 오기까지 그보다 더 극심한 지옥 같았던 마음을 부여잡아야 했다. 괴로움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단어들 중 대표적인 것인 지옥에도 층위가 있었다. 이제야,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내 지옥은 '살만한 지옥'이 되었다. 지옥을 견뎌볼 수 있게 된 건, 그래도 가끔씩 언뜻 보이는 희망의 빛 때문이다. 소중하고 두려운 희망이다. 이 희망마저 다시 붕괴됐을 때, 인류가 차마 명명하지 못했던 지옥보다 더 끔찍한 무언가의 고통이 있을까 봐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옥에 때론 순응하고 지옥조차 없는 세상을 갈구하다가 시간이 흘러, 어쩌면 남은 생에 덜한 지옥이나 지옥이 아닌 날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빛이 아주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지옥을 이겨내거나 극복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나는 그대로 나였고, 삶은 여전한 삶이었다. 영화 <토이스토리 3>에 대해 이동진 평론가는 '어떤 이별은 그들 사이의 시간이 흘러갔기 때문'이라는 코멘트를 남긴 적 있었다. 마찬가지다. 어떤 구원도 그저 시간이 흘러갔기 때문에 내 삶에 희미하게 방문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고통을 참아내며 가장 힘들었던 건 세상 어디에도 이 고통이 나아진다는 기약이 없다는 막막함이었다. 너무 어렸던 20대 초반 나에게, 10년 후쯤의 나이가 되면 통계적으로 보통 아픔이 완화되는 추세가 있다는 조언은 아무런 공명을 울리지 못했다. 남은 생이 길었고 그 모든 날들이 잿빛일 것만 같았다. 순간순간 기분이 좋아지는 때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임을 그때 역시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짧은 시간 조금만을 부질없이 소망하며 생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하나로 거대한 생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 역시 부조리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때론 울고 꽤 많이 깊이 회의하며 죽지 않고 생을 이었더니, 이제야 조금 희망의 자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아졌는지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때론 담담히 또 때로는 격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그에 보탤 말이 하나도 없이 정말 무색하게도 적극적인 시도를 단 조금도 한 적 없었다. 그러니 이제야 삶에 희망 비슷한 게 목격이라도 되는 건 아마 '통계적으로 보통 아픔이 완화된다'는 나이에 내가 살아서 진입했기 때문일 테다. 굳이 애써가며 살아있으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었기는 한데, 다만 어찌됐든 죽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뒤틀린 심보가 의도치 않게 준 선물이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 조금이라도 이겨냈는지 묻는 이들에게 아무런 해줄 말이 없다. 다만 죽지 않고 버티고 있다 보니 일부 고통에 대해서는 면역이 생겼다는 경험이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지옥 같았던 시간을 거쳐 얻게 된 '살만한 지옥'

다만, 이제야 보이는 건 나의 '주위'다. 인정하기 싫었고 사실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진실이지만, 서로가 소중하다고 하는 사이는 슬픔을 감기처럼 함께 앓는다. 당사자인 나만큼의 아픔을 아니었겠지만 아픔이 나만의 전유물 또한 아니었다. 가족, 친구, 연인 그리고 가끔 만났던 지인들까지. 세상의 무너짐과 희망의 반복된 몰락을 과연 혼자서만 있던 세상이라면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을까 싶다.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희망의 기척을 느끼게 된 지금이지만 어쨌든 죽지는 않고 있었던 것만이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무엇일지도 모른다. 때론 무척이나 지쳤던 그 열심에 응원과 격려 그리고 지지가 있었기에 많은 부침과 우여곡절에도 버틸 수 있었다. 그리 가볍게만 스쳐간 인연들이 아니라면, 지금은 소원해진 관계에도 마음속 깊은 고마움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뮤지션 밍기뉴의 노래들 중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에는,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너무 힘들고 고된 일일 것 같다는 가사가 있다. 무슨 위로를 건네도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는 내게 그럼에도 용기를 주려고 애썼고 나의 무너짐이 다신 일어날 수조차 없는 붕괴가 아니도록 살펴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좌절도 적지 않았을 테다. 능력이 되지 않아 행여라도 이 지옥에서 조금 벗어나도 이들에게 남은 삶을 살아가며 살뜰히 갚아가겠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괴로워하는 누군가를 어떻게 헤아리고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공부할 수 있었다. 소중한 배움이고, 내 삶에 돈벌이 이외의 책무가 있다면 아마도 이를 통한 실천일 테다.


비로소 살만해진 지옥에서 나는 가끔 꿈을 꾸고 다음을 그린다. 여전히 삶은 외롭다. 또 종종 아플 때도 많다. 비뚤어진 과거는 질투와 시샘이 심하다. 나의 삶이 지금과 앞을 향하는 걸 그토록이나 아니꼬워하고, 내 발목을 우악스럽게 붙잡고는 한다. 그럼 난 다시 멈춰 서거나 무너져야 한다. 이미 여러 번 아팠기에 다시 일어나는 건 언제나 어렵다. 그럴 때면 마치 지옥의 세상이 감히 벗어날 꿈을 꾸었냐며 나를 조롱하고 꾸짖는 것만 같다. 애써 품게 된 생의 희망이 언제 다시 소제될지는 모르겠다. 그런 일이 다시 있을 때 내가 그것까지 견딜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이 정도의 날들이 유지만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래도 살아는 있다 보니 이런 소박한 희망들이라도 가끔 가져볼 수 있게 됐다. 그건 다시 말하지만 어떤 특정한 노력과 최선의 구체적 선물은 아니다. 다만 애써가며 버티려던 노력 하나가 '통계적으로' 통증이 많이 완화되는 나이에 나를 도달시켰기 때문이다. 삶은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게 맞다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그 사이의 시간 전체 역시를 혼자서만 살아야 했다면, 지옥조차 없는 세상을 더욱 괴롭게 갈망했을 테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나아지지 않은 것인지 나조차도 헷갈릴 때가 있다. '좋은 날'은 아직 요원하고 그래서 아픈 날들을 버텨낸 게 정말 잘했던 것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오랜 날들 동안 전무했던 희망이 겨울 끝 봄의 새싹처럼 반갑고 그 토양 안에 내 주위의 응원과 지지가 있었음이 새삼 떠올라, 괜히 시큰하고 뭉클하게 오후 따스한 햇살을 바라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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