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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엿 같고 벗 같은 글쓰기

조금씩 다시 무용한 글쓰기를 시작하며

by 사랑의 천문학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지 않니,라고 편지를 썼던 영화 <윤희에게> 속 누군가의 마음처럼 나도 10년 전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써야만 버틸 수 있었다. 세상은 넓었지만 털어놓을 누구 하나 찾기 어려웠다. 하룻밤 사이 휘발될 술자리의 넋두리로만 남기기는 싫은 마음앓이였기도 했다. 그러기엔, 내 슬픔이 가련했다. 사실 더구나 마른안주 같은 알맞은 응원과 적당한 격려를 위한 대가가 되기엔 너무 길고 지루했으며 무엇보다 지나치게 나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재주가 있었다기보다는 다른 방편이 없어 글을 찾았다. 글에 기댄 날들이 있었고, 그랬던 글과도 등지게 된 순간들도 없지 않았다. 미안하게도 글쓰기를 구도하듯 대하지는 못했다. 글은 대단했지만 미미했다. 글은 현실을 해결할 수 없었다. 아린 마음의 여린 숨결이 글 안에서 치유를 발견했지만, 다시 용기 내 마주한 세상은 여전히 잔인할 뿐이었다. 혹독한 세상에서 나는 살아낼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무엇도 증명하지 못했던 숫자들은 나의 무능과 뒤쳐짐을 선고했고, 나는 삶의 법정에서 열렬히 항소이유서를 써댔다. 보통 자기소개서라는 이름으로 집필에 가깝게 서술된 변명문이었다. 게걸스럽게 글의 효용을 찾아댈수록 글쓰기는 점점 무용했다. 한때 누구보다 나를 위로했던 글이, 이제는 나를 옥죄었다. 분명 언젠가 글쓰기는 나의 꿈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사실 살면서 가졌던 꿈이 손에 꼽는다. 손에 꼽을 만큼 신중히 꿈을 꾼 게 아니라 삶에 영감을 불어넣을 줄 몰랐고 이를 공부하는 데 나태했다. 생이라는 항해가 방랑이면 어떻고 방황이면 어떠며 표류면 또 어떨까 싶었다. 가라앉지만 않고 어디론가 나아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철부지 생각이 내 삶 대부분을 지배했다. 언젠가 무심코 한 말이지만 스물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핑계들로 빈곤한 상상력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게 그 이후 지금까지의 날들에도 면책 특권을 줄 수는 없다. 그러니 꿈 없던 시절까지 누군가 또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별 꿈을 꾼 적 없는 건 내 책임이다. 그렇다고 그게 아주 큰 잘못이라고도 생각하지는 않다. 교통으로 따지면 범칙금도 아닌 결격 사유에 '죄목'이라는 말은 턱없이 가혹하다. '꿈'의 소용은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도료로써 기능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꿈을 꾸지 않았기에 인생이 덜 재밌어졌지만, 스스로의 삶에 재미가 줄어든 게 누군가에게 다른 미안할 일은 아니다. 다만 다름 아닌 삶의 주체인 나 스스로에게 겸연쩍은 건 있다. 또, 조금 궁금은 하다. 혹시 내게도 '추구'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노력할 꿈이 많았다면, 나는 조금 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센 사람이 되었을까. 아마도 아니긴 할 테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성공의 희열보다는 실패의 아픔이 몇 배는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니까.


다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아 시작한 글을 통해서는 꿈같은 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꿔 보기는 했다. '책을 내는 것'이었다.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 처음 사랑한다고 말할 때의 전율 비슷한 걸 책을 낸다는 상상에서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소위 버킷리스트들과는 분명히 달랐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꿈이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면 출간은 '인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무엇도 없는 주제에 우승꽝스럽게도 독립출판 등에는 길을 구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내 글이 누군가의 자본을 동원하여 출간이 된다면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당시의 삶도 얼핏 봐줄 만한 구석이 생길 것만 같았다. 꿈을 추동하는 게 꼭 '꿈'이라는 단어처럼 예쁘고 순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꿈은 죽음으로의 일방향적인 무기력한 선형적 구조 안에서 반드시 도달하고픈 경유지인데, 동기의 심미성보단 간절함의 크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자존감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기질적으로 그랬다.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숱하게 학급 임원까지 여러 번 지냈지만, 돌이켜보면 그 경험들은 내 허약한 자존감을 이름 있는 감투질로 바느질하려는 서글픈 시도들이었다. 그러면서 든 나쁜 습관이 내 행위들의 수준을 평가하는 일을 타인의 채점에만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다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글쓰기 또한 취미로의 글쓰기에만 그치지 않고 '출간'이라는 결실을 맺고 싶어졌다. 그것도 누군가가 '출판'하는 '출간'으로 말이다. 이제 와 솔직히 말해서 그래야 조금은 더 멋있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은 애처로운 꿈이었다.

무용한 글쓰기는 사실 그리 무력하지만은 않았다.

한 주 끝에 이르러 꽤 자주 로또를 사지만 당연히 대부분은 낙첨이다. 앞으로도 대단한 행운이 내게 올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내 삶이 가진 행운의 총량이 그 정도로 크지는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다. 물론 아주 수학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매 이벤트는 독립 시행이니 이전과는 무관한 확률을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거의 확실하게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계산했을 내 행운의 합은 평균에 수렴할 거라 믿는다. 그것도 감지덕지다. 거기다 나는 성장하며 간절했던 무언가를 가지지 못해 견딜 수 없어지기 전에 대부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나는 행운이 따르는 편이다. 너무 놀랍게도 '출간'의 '꿈'도 그렇게 꽤나 빨리 현실이 됐다. 그토록 갈구했던 '출간 작가'에 대한 갈급이 20대 중반에 해소됐다. 정말, 작가가, '되어버렸다.' 오직 행운의 결과다. 그때의 책을 떠올리면 부끄럽기만 하다. 판매량을 염두에 둔 수정이 판매 부수와 만족도 무엇도 잡지를 못했다.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출판사의 피드백이 가장 덜했던 에필로그일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출판사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뭐 하나 가진 거 없는 글쟁이에게 '출간 작가'라는 과분한 칭호를 부여해준 출판사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이다. 다만 살면서 두 번 다시 책을 내기는 어려울 것만 같아, 이왕 내 마지막 작품으로 남을 그 도서가 조금 더 나를 담백하게 담았다면 좋았겠다는 마음이다. 그렇게 나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작가가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이후 글과는 사이가 멀어졌다.


먼저 사람들의 신경을 더욱 쓰게 되었다. 고작 그 정도의 판매량만을 기록한 주제에 앞으로 평생토록 내가 쓰는 글은 익명이 아니라는 무서움도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독했던 계정을 한 순간에 탈퇴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생각해 보면 자의식 과잉이었던 것도 같지만 그 당시 시점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인생엔 많고 이는 돌아가도 비슷할 것만 같다. 거기에 애써 낸 책이 개벽할 만큼 나의 팔자를 고쳐줄 상황이 못 됐으니, 여느 경영학과 학생처럼 나 또한 졸업 후의 생존 수단을 모색해야 했다. 자기소개서마다 또 면접 때마다 내 볼품없는 책을 여기저기 팔아댔다. 지금은 떠났지만 한때 마케팅 부서에서도 근무했던 경험으로 말미암아 마케터가 떠올릴 수 있는 제일 공포스런 상황은, 내가 파는 제품이 형편없을 때다. 회사에서 내가 마케팅해야 했던 품목들은 그런 적이 다행히 없었지만, 취업 시장에서의 내 이야기는 언제 정곡을 찔려 꺼질 줄 모르는 위태로운 풍선 같이 부풀려진 것처럼만 보였다. 책을 냈다는 경험 자체는 특이했지만 내실이 없었고 내가 낳은 책임에도 이에 대해 좋은 시선을 나 스스로 견지하기 힘들었다. 취업 준비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행운이 완전히 소제되지 않아서 가능했던 취업 성공 이후에도 가끔은 글을 썼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을 잊었다. 삶의 다른 데에 재미를 붙인 것도 아니었으나 글에 지겨움 없는 권태를 느꼈다. 그건 화면 안 글들에 적히는 나의 모습이 언제나 무기력하고, 초라하고, 볼품없으며 슬펐기 때문이었다. 그 힘든 취업 이후 나는 마찬가지의 괴로운 시간을 보냈고 어느 순간 글이 아닌 토로가 되어버린 글쓰기였다.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시작한 글쓰기가, 차라리 참는 게 나아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슬며시 '참을 수 없다'는 구절에 빚지게 되었다. 그냥 오랜만에 글이 다시 쓰고 싶어 졌고, 그게 아직은 퍽 할 만하다. 대신 이전처럼 도무지 내 얘기를 건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참을 수 없음'에서 기인한 글쓰기는 아니다. 그냥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그에 앞선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무엇을 도무지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거나 하고 있으면 마냥 괴로운 건 모두 양 극단에 위치한 '건강하지 않음'이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지금의 글쓰기고, 그래도 쓰는 게 조금은 더 재밌어서 생각과 감정을 미약하게나마 활자로 옮기고 있다. 언젠가는 글쓰기는 세상과의 유일한 창구였고 또 언젠가는 살면서 유일하게 가져 본 꿈이었다. 다시 언젠가 글쓰기는 나의 나약함과 무능을 발견하는 바랜 거울이었고 이를 팔아재끼는 스스로가 역겨운 위선자처럼 비치기도 했다. 글쓰기는 분명 언젠가 내게 '엿'같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나를 떠나지 않은 '벗'이기도 하다. 이젠 글쓰기를 발판 삼아 무언가를 충족하거나 이루겠다는 목표가 없다. 누군가의 인정을 크게 바라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싶던 표현을 통해 구현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과잉의 신파가 가득했던 내 첫 책의 본문 이후 비교적 담백했던 에필로그 같은 요즘이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처럼, 언젠가 시간이 흘러도 내가 큰 거부감 없이 꺼내만 볼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이제 이 말이 진심뿐이라 다행이다.


글을 자주 쓸 때도 있을 거고 다시 오래 찾지 않을 날들도 있을 테다. 그럼에도, 매번 무기력하지만은 않을 나의 친애하는 무용한 글쓰기다. 글쓰기는 언제나 내 편은 아니었기에 때론 엿 같았지만, 오랜 시간 내내 내 옆에는 있어줄 소중한 벗 같은 존재다. 필요할 때만 글쓰기를 절실히 찾을 뻔뻔한 나지만, 글은 언제나 말끔히 나를 반겨줄 거라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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