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MBTI만으로는 불충분하니까

조금 더 즐거운 비효율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이 저 단순한 16개의 메트릭스에 모두 분류될 수 있으면 그거야말로 기적일 것 같다고, 이젠 유행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대세가 된 MBTI를 보며 느낀 적 있었다. MBTI는 차갑게도 명료하여, 구구절절하고 장황한 내가 정감을 갖기에는 조금 어렵다. 그래서 여전히 나의 MBTI만 사회적 교류 차원에서 겨우 외우고 있을 뿐이다. 나는 '굳이'를 좋아한다. 굳이 길고 힘든 여행을 떠나고, 굳이 글을 쓰고, 굳이 요약본이 아닌 영화 전체를 보려고 한다. 간결한 본문보다 그 세세한 각주에 더 눈이 간다. 그러니 재미로 한다는 MBTI가 내게는 재미가 없다. I와 E만 보면, 사람을 내향인지 외향인지로 분류해놓고 있다. 물론 의미있는 구분이다. 어쨌든 에너지를 대인 관계에서 얻는지 반대로 혼자만의 시간에서 충전하는지를 어렴풋이라도 아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구분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때론 '굳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들어야하나 싶은 내용들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지내는 누군가가 독서 클럽의 모임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외향인가 내향인가. 어디든 나는 그 사람이 지향하는 취향과 삶의 가치가 더 궁금하다. MBTI는 한 사람을 간략하기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혈액형이나 별자리보다는 낫지만, 동시에 MBTI를 안다고 그 사람에 대해 '다 파악했다'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지표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공통 주제로 MBTI는 제 역할과 소임을 너무나 잘 해내고 있다. 어색하게 만난 두 사람에게 둘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화젯거리가 있다는 건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MBTI는 절대 무용하지 않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이 지나치게 아득하고 암담하여 상상하기도 싫은 것처럼, MBTI 없이 처음 만난 누군가와 대책 없이 얘기를 시작해야 했던 순간도 돌아보면 숨이 막힌다. MBTI의 효용은 실재한다. 실재는 하는데, 가끔은 이 심리학적 지표의 존재감이 너무 커져서 문제다. 2의 네 제곱인 16개의 분류니 많아 보이지만, 전 세계 몇 십 억 명의 사람들을 이 4 x 4 메트릭스에 욱여넣는다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 틀도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더욱 우려되는 건 '유형화'의 위험이다. 물론 내 몸에 흐르는 피의 유형에 따라 나를 재단해댔던 지난날의 비과학적 미신보다는 낫지만, 어쨌든 같은 유형에 속한 사람들을 섣불리 단정지어버리는 오류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인류의 유형은 2의 네 제곱을 다시 네 제곱 해도 모자를 정도로의 카테고리가 있다. 아니 어쩌면 한 개인 그 자체가 하나의 배타적인 유형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인지가 없다면 우린 누군가에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파악했다는 실수를 하며 무례하게 그 사람의 생을 침범할지도 모른다. 절대 무용한 건 아닌 MBTI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이후에 나오는 '그러나' 혹은 '그래서' 등의 첨언에 더 귀를 기울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말 내가 궁금한 이야기는 그곳에 있다.

통계를 좋아한다. 통계가 좋은 이유는, 결국 통계학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연인들은 무수히 많을 테다. 이별의 변을 간략히 이야기하며 '달랐다'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들도 꽤 있다. 그러나 그 통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회의가 있다. 차라리 그 중 한 커플의 미어지는 이야기를 더 오래 경청하고 싶다. 숫자를 늘 살피면서도 결국 나를 매료시키는 건 '사연'이다. 달랐던 마음에도 사랑을 지키고자 했을 노력, 그럼에도 노력의 온도가 달라 마음 아파하며 흘렸던 눈물의 투명함, 결국은 마지막을 결심할 때 부서진 마음의 파편이 찌른 상처의 아픔, 끝내 그 말을 전했을 때의 목소리의 떨림 등.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성격이 달라 헤어졌다'는 건조한 한 문장을 골똘히 응시하며 얼마나 가슴 저리는 사연들이 웅크리고 웅크리다 저토록 건조해졌을지 떠올리는 게 최소한 내게는 더 의미있는 시간이다. 글을 쓰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일 수도 있다. 가끔 힘든 하루였다,라는 구절 하나를 여러 문단으로까지 살을 붙이는 건 그 힘듦의 마음을 더 정직하게 표현하고 싶어서다. 집계된 총합보다 그 세부 명세가 때론 더 중요한 삶의 층위들이 있다. MBTI는 한 사람을 읽어내는 첫 페이지여야 하는데, 우린 그것만으로 우리가 살아보지 않고 살아낼 수 없는 인생을 사는 누군가를 많이 알았다고 착각한다. 보통 오류는 이런 오만에서 발생하고는 한다.

가끔은 두 시간짜리 영화의 요약본을 보고, 그 영화를 '다 봤다'고 하고 싶은 욕망을 느낄 때가 있다. 더욱이 이 정도면 진짜 잘 만든 영화 같다며 별점을 줘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굳이 실천에 옮기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던 생각 뿐인 생각이었다. MBTI는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그런 요약본 같은 지표다. 감독이 순간마다 고심했을 편집과 배우들의 작은 떨림까지 전해지는 연기에 대한 몰입 없이 단순히 줄거리 전개만으로 영화를 다 봤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대체로 자신의 인생이 이런 유형이었다고 말하는 네 자리 알파벳을 듣고 그를 온전히 알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피상적인 것 이상의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한 번 더 되묻고, 한 번 더 생각하여 답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MBTI가 커뮤니케이션의 오류와 삐걱거림 혹은 정체에 기여했다는 부당한 기소를 하고 싶지는 않다. 더없는 공감대를 제공한 MBTI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결국 활용의 문제다. MBTI와 관해 이야기하면서, MBTI가 설명하지 않은 영역에 대한 소통과 대화가 함께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네 글자 알파벳이 아니라, 내향적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내 앞에서는 환하게 웃으며 편하게 시간을 나누며 행복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다. 바쁜 인생에 피곤하게 살겠다는 게 아니라, 깊은 관계 맺음을 하고싶은 사람에게는 '굳이' 조금 더 노력하겠다는 의미다.

때론 '굳이' 이토록 긴 여행을 떠나는 삶처럼

맥시멀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의 논쟁에서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다 모르겠고 일단은 '효율주의자'에는 가까운 것 같다고도 얘기한다. 많은 게 많아서 나의 기분을 좋게 한다면 좋고, 불필요 한 건 최대한 없어서 역시나 눈에 안 보이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효율'은 내게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가치인데, 그 효율이 잘 이루어져야 내가 애정하는 '비효율'들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효율과 비효율을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둘이 불가분의 보완재라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MBTI는 그런 의미에서 효율화를 위한 좋은 수단이다. 우린 간단명료한 MBTI를 들으며 그 사람에 대한 얼핏 스케치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생성형 AI처럼 우리의 필요 노동을 감소시켜주는 도구다. 이제 스케치를 정말 생생한 그림으로 바꿀 차례다. 물감은 우리의 질문들이다. '굳이' MBTI가 표현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한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인상과 앎을 채색할 수 있다.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다. 매번 다른 사람에게 이런 과정을 반복하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친밀하고 소중하고 싶은 누군가에 대한 앎을 MBTI 정도로만 머무르게 하는 것도 다소 서글프다. MBTI는 사람과의 접촉을 조금 더 효율적이고 편하게 만든다면, '굳이'의 질문들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꾸민다. 효율 역시도 어디까지나 생이 더 즐겁기 위한 수단이다. 누군가의 MBTI 네 자리를 알았음에 자족하지 않고, 그 다음 페이지를 계속 이어 읽어나가는 노력을 계속하여 기울일 것이다.

뭐, 어쩌면 이 모든 것도 내가 INTJ라서 그럴 수도 있다. 사실 INTJ가 정확히 뭐 하는 MBTI인지도 여전히 잘 모르겠기는 하다. 아무래도 확실히 나는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좋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