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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만 원래를 살지 않기

의연해보기라는 소박한 또 다른 목표

by 사랑의 천문학

영화는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지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훌륭한 한 줄 평은 영화를 한 문장에 모두 담을 수 있지만, 세상과 생은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이유다. 삶의 진실을 충분히 담아냈다 믿어지는 간략한 통찰들에도 실은 온전한 깊이는 종종 결여돼 있다. 그 정도의 간단한 구호 하나도 조탁해 내기 어려운 나는, 세상에 대해 어떤 시의 구절처럼 아무것도 모른다. 엄마는 내게 '교만하지 말라'라는 당부를 자주 한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세속적이라 작은 성공에도 자주 우쭐대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최소한 앎의 측면에서만큼은 겸허함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사실과 다 알아질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는 걸 의식적으로라도 되새기고는 한다. 우스워보이고 싶지는 않아서다. 몰라도 너무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아가려는 의지조차 없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모른다고 손을 드는 게 조롱의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다 알았을 리가 없는 세상의 진실 일면을 통달했다며 으스대는 모습만큼 지켜보기 어려운 게 없다. 어릴 때부터 나의 목표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실소를 자아내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불쾌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이들이 내게 있어서는 '꼰대'의 정의였고, 그러니 모든 게 다 돼도 꼰대는 되지 말 것이며 무엇도 못 돼도 꼰대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자는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누구나 언젠가 꼰대가 될 것만 같은 세상에서 이 역시 교만일 수도 있겠지만, 길이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남을 희망 같은 건 애초에 없으니 이 정도면 소박한 목표가 아닐까 자평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상에 '꼰대'라는 단어의 용례가 늘어났다. 일단 나이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꼰대가 될 확률이 높은데, 그 와중에 '젊은 꼰대'라는 신흥 꼰대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부적격 스티커를 붙이는 일에는 신중해야 된다고 믿는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당위적 바람도 있지만, 이쯤 되면 나마저 꼰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현실적 위협이 더 큰 이기적인 이유에서다. 얘도 꼰대 쟤도 꼰대지만 나만큼은 결백하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되려, 본인이 꼰대임을 못 받아들이는 꼰대라며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꼰대'가 특별하면 좋겠다. 다른 단어로는 도무지 대체할 길이 없어 꼰대라고밖에 할 수 없을 사람에게만 '꼰대'라는 호칭이 부여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 사람을 보며 나도 자기 검열과 조심이라는 걸 할 수 있다. 이러다 신생아를 빼고는 모두가 각자 늙고 젊고 어린 남녀노소 꼰대들로 가득한 세상이 될 것 같은데,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서 나 같은 사람도 결국 도망갈 곳을 잃게 된다. 일종의 무기력이다. 인정하면 편하다는 삶의 편의가 예외가 되어야 할 영역도 존재한다. 태도, 예의, 윤리 등 세상이 오랜 시간 형성하고 지켜내고자 노력했던 가치들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불안하다. 꼰대질에 있어서 죽을 때까지 하늘 우러러 한 점 안 부끄러울 자신이 없다. 꼰대는 되지 말자는 작디작은 목표가 꼰대라는 단어의 남용 때문에 위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남발의 확산세를 보며, 새삼 조롱 가득한 혐오 표현의 재빠른 전염성에 감탄하기도 한다. 재치에도 그림자는 있다.


진심을 다하여 교만하지 않는 건 어렵고, 꼰대라도 안 되겠다는 목표도 달성 여부가 희미해졌다. 그래도 아직은 스스로가 덜 꼰대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조금은 덜 거창한 계획이 하나 더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 뜻하지 않은 혐오적 시대정신으로 어려움에 처할 수 있게 생겼으니, 이제는 어떻게 되겠다는 긍정형의 문장이 나을 것 같다. 사실 이리도 대단한 사고 회로를 통해 나온 결론은 아니긴 하지만, '의연'이라는 단어의 굳건함이 괜히 좋아 이를 추구해보고자 한다. 인정은 하자. 나도 성숙하고 싶다. 그러나 누구보다 내 삶이라는 빅데이터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차마 그게 내 삶에서 가당키나 한 목표라는 소리를 할 수 없다. 그릇이 작고 호들갑이 요란한 나는 성숙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나마 가진 장기인 '자기 객관화'를 통해 내린 결론이다. 대신, 조금씩 더 나이를 먹으며 '의연'이라는 가치에는 근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떨어지는 꽃잎을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라 여기는 속 깊음은 가지지 못해도, 또 한 번 꽃잎이 떨어졌구나 정도의 담백한 사고까지는 엉금엉금 기어라도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내게는 무척 필요한 자세이기도 하다. 마음이 자주 무너지는 편이다. 마음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기에 작은 충격에도 다시금 그동안의 굳셈이 와르르 헝클어지고는 한다. 조금은 굳세고 싶다. 아파하지 않는 냉혈한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부서지지는 않게 마음을 보듬고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의연함 속에서 차분히 오랜 시간 내가 존중하고 믿는 단어들을 읊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덜 꼰대'로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도 있다.

'원래대로만 원래를 살지 않기' / 본문과 무관한 이미지(그저 예전 여행 중 찍은 사진이 예뻐서 넣었다.)

그래서 멀어지면서도 가까이해야 할 이상한 단어가 바로 '원래'다. '세상은 원래 그래'라며 섣불리 체념하지 않아야 하고, '나는 원래 그래'라며 무례해지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과 나의 '원래'가 어떤 모습인지를 아주 망각해서는 안 된다. 현실이 잊힌 지향은 공상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발 딛고 사는 세상이 어떻고 그런 나는 지금 어떤지에 대해서 복기하고 학습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 어떤 재테크의 시작도 현재의 이를 어쩌나 싶은 잔고를 들여다보는 일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의연함'은 이 '원래'에 대한 깊은 인지에서 가능하다. 의연하고 담담하게 삶을 닥쳐오는 일을 수용한다는 건 거대한 운명에 무력히 굴복하겠다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굴종의 열매는 때론 달겠지만 사람은 단맛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가끔은 세상이 호되고 못되고 잔인할 수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으며 삶이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음에 대한 사고가 선행돼야 비로소 '의연'할 수 있다. 거기까지가, 세상과 나의 '원래'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가능함이다. '의연함'은 결국 '희망'과도 연계돼 있다. 결국 이를 버텨내는 게 무가치한 일이 아닐 거라는 자기 믿음이 어쩌면 희망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 세상'을 살아가며, 이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만 살아지지는 않을 것'임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게 의연한 삶의 태도 아닐까. 인정하기 싫을 땐 가깝고 필요할 땐 먼 단어가 '원래'인데, 결국 '원래'와 어떤 적정선의 거리를 지킬 수 있느냐가 의연함을 성취하고 나아가 '덜 꼰대' 정도로만 머무를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일 될 것이다.


취업 시 자기소개서들의 첫 문항은 보통 자라온 성장 환경과 더불어 이 회사와 직무에 왜 지원했는지를 서술하라고 한다. 보통의 템플릿은, '저는 무얼 하는 사람 누구입니다‘라는 정의내림으로 시작된다. 자기소개서 작성에 대한 문의를 혹여라도 받게 되면, 우선 저 첫 문장에 대해 미리 고민해 두면 두고두고 편하다는 조언을 건네는 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한 나 역시도 정작 나의 취업 때는 저 한 문장이 생각이 안 나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다행히 회사와 직무에 대해서만 골똘히 고민하면 됐기에 백지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삶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나는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아마도, 이딴 바보같은 문항에 답을 할 수는 없다는 꼰대스러운 교만함을 부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멋진 한 문장에도 내 삶을 온전히 담아내기는 어렵다. 그건 내 언어와 사고의 부박한 한계에서 기인했다기보다는 차마 한 문장으로 인생을 욱여넣고 싶지는 않다는 철없는 소신에 가깝다. 하나의 생이라는 총체의 일면에만 빛을 유독 비추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한 줄 평에도 나는 소질이 있을 리 없다. 한 줄의 서투른 문학으로 세상을 전부 담아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고집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꺾이지 못할 것까지는 아니니, 나는 세상을 '죽어도 모르겠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을 '죽어도 세상을 모르겠다고 죽을 때까지 되뇌다 죽게 되는 인생'이라고 초라하게 답하지 않을까. 다만 조금의 관용이 허용된다면, '그래도 그게 뭔지 알아는 보려고 했던 삶' 정도를 각주로는 붙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나의 답변과 내 삶을 대조해 보며, 그래도 '의연한 덜 꼰대로 살았던 것 같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 그 정도면 더없는 성공이다.


막상 결론에 이르니, 요즘 같은 시류에 꼰대가 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의연'도 어려운 목표다. 목표는 적당히는 어려워야 타당하지만, 마찬가지로 너무 어려워 보이는 구석이 있다. 당장 오늘 나의 응원하는 야구팀이 졌다고 조금 분노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나 같은 사람에게 '의연'도 하늘에 별 따오기만큼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아닐까 싶기는 하다. 그래도 원래 내가 이토록 작고 모양 빠지는 사람인 걸 알고는 있으니, 의연할 준비는 되었다고 다시 역시 참 별로인 마음으로 으스대게도 된다. 나란 사람 참, 여러모로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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