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다시 친구가 되며
나 조차도 종종 잊을 때가 있는데, 몇 년 전 책을 낸 적 있었다. 많이 팔리진 못했다. 민망하여 판매 부수를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서점에 가면 느끼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세상에 책이 너무 많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점점 드물어지는데 여전히 신간들이 넘친다. 담백한 나쁜 말을 하나 하자면, 그들 중 상당수가 내 책의 여로를 따를 것이다. 잊히다가, 묻히다가, 몇몇 책의 작가는 나처럼 작가로서의 자의식조차 잊을지도 모른다. 책 자체의 좋고 나쁨과 판매량이 정비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내 책이 굉장히 빼어났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던 불운아라는 소리는 아니다. 내 책은 졸작이 맞았다. 책이 세상에 나오도록 도움을 주었던 당시 출판사 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헌신 덕분에, 겨우 책 구실 정도를 할 수 있는 글이었다. 어설픈 작가의 허술한 원고를 다듬느라 고생했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책이, 양심은 없게 들리겠지만 나름대로의 판매 성과를 거두기를 바랐다. 작가는 나였지만, 결코 혼자서는 그런 책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현대 사회에서 판매량은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은 걸 대신 설명해 주며 때론 그 자체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는 지표이기도 하다.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노고가 빛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진심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원재료가 부실하니 어쩔 수 없었다. 출판사의 마케팅이나 타겟팅을 논하기에 앞서,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의 이름을 표지에 내걸고 책을 내는 사람이라면 자기 책의 생애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내 책의 판매 부진은, 여전히 내 귀책이다. 그게 글 자체의 문제였든 나 자신의 전무한 영향력 때문이었든 말이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어디 회사의 예산이 투입된 프로젝트가 손익 분기점을 넘지는 못한 것 같으니, 나에게만 애틋했다고 좋은 경험이라고까지 칭하는 건 무례해 보인다. 하지만 20대의 나이에 평생 한 번 내기도 힘든 출간 작가가 된 것은, 속된 말로 "기분 째지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지금보다 세상을 덜 알았고 덕분에 더 자신만만했다. 졸작이든 아니든 일단 결과물을 내고 나면, 유식한 말로 "대중의 반응"을 살피는 시간도 가져보기도 했다. 몇 없는 반응 속에서 냉혹한 평가를 마주할 땐 내가 뭐라고 온종일 기분이 침울하기도 했다. 작가로 살고 싶진 않았으나, 작가가 되어보고는 싶었다. 20대 초반 그 꿈을 가졌고 몇 년 되지 않아 그 목표가 현실이 됐다. 나 좋자고 나만을 위해서만 글을 써댔는데, 책을 낼 때와 책을 낸 이후에는 우습게도 "대중"을 굉장히 의식했다. 나름의 연예인병이 아니었나 싶다. 누구도 그리 진심으로 관심을 갖지는 않았을 텐데, 평가 하나하나에 상처받고 웃고 온갖 짓을 다했다. 생이 어둡던 날들에, 글 덕분에 나는 지탱될 수 있었다. 나를 지켰던 글들을 골라 책을 냈고, 희한하게도 이후 나를 잃어갔다. 글만큼 재밌는 게 없었는데, 글쓰기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 나름대로 어딘가에 글을 올린다는 사실에까지 약간의 겁을 먹기도 했다. 자의식 과잉이자 과민반응이었음이 분명하지만, 20대 중후반은 우스워 보이는 행위들에 열렬히 진심일 수 있는 나이다. 작가가 되고, 역설적으로 글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글은 무슨 글, 그냥 먹고나 살아야지. 이전처럼 글쓰기에 대한 강한 이끌림을 느끼지 못했고, 그렇게 서서히 글을 쓰는 빈도는 현격히 줄었다. 그러다 어느덧 내가 쓰는 글을 자기소개서뿐이 없게 되었다.
이름 있는 출판사를 통해서 나름 책도 내 본 작가,라는 우쭐함은 '서류탈락'이라는 네 글자 앞에 와르르 무너졌다. 오히려 열패감이 밀려왔다. 작가 새끼라는 녀석이 써봤자 기업체 서류 하나 통과를 못하는구나. 물론 부족한 글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글쓰기든 뭐든 하느라 대학 시절 수업에는 불성실하며 개차반 같은 학점이 일단 내 발목을 굳게 잡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낭만적으로 살겠다는 이상한 신념에 도취되어 남들 다 하는 인턴도 하지를 않았으니 부족한 정량을 변명할 스펙도 부족했다. 모자란 사람도 하나씩은 장점이 있고, 나는 다행히 자기 객관화를 어릴 때부터 잘하는 편이었다. 나의 숫자와 경력이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류탈락이라는 결과는 나름의 충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더욱 합격을 위한 글쓰기를 해댔다. 아, 정말이지 그런 글쓰기는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꾸역꾸역 자기소개서를 써대어 서류를 합격하고, 운 좋게 지금의 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나의 첫 직무는 마케팅이었다. 마케팅이라니, 이제 다시 내가 오래도록 천착했던 글쓰기가 빛날 줄 알았다. 하지만 잘 팔리는 문구를 작성하고 상품을 기획하는 일과 내가 좋아한 글쓰기는 다른 영역이었다. 취업을 준비하며 나는 마케팅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고려했었다. 막상 마케터가 되어 발견한 건 이게 나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서글픈 현실이었다. 우울해졌고, 그때 가끔이나마 쓰던 글은 더욱 바닥 같은 현실을 냉소할 뿐이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 직무에 나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하나 남긴 채 지금의 직무로 옮겼다. 이맘 때쯤, 글쓰기는 더 이상 내 삶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책을 낼 정도로 글쓰기에 열심이었던 사람이, 더 이상 글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직무마저도 '글'의 영역과는 아예 멀어졌다. 참 열심히 써대던 글이었는데, 습관을 잃으니 한 편의 글도 작성하기 힘들었다. 글에도 근육이 필요했음을 느꼈고, 관성이 사라져 감을 인지할 수 있었다. 단 한 편의 글에도 이런저런 사고를 전개하기 힘들었다. 세상은, 그런 고됨 없이도 충분히 너무 벅찼다. 정말 아등바등 버텼고 적응했다. 가끔의 인정과 때로의 질책을 경험하며 시간은 흘렀다. 그러다 올해쯤, 문득, 글이 다시 쓰고 싶어졌다. 오래도록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묻는 느낌으로 글을 썼다. 다소간의 어색함을 이겨내며 한 편의 글을 완성했고, 그게 퍽 재밌었다. 그제야 나는 이렇게 글을 쓸 때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글이 내게 묻는 듯했다. 마음껏, 잘 쉬었냐고. 그러면서 동시에 글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돌아와서 반갑다"라고. "이제, 다시 네가 예전에 그랬듯 너만을 위한 글을 써보라"고. 나는 너무 나만 아는 사람이다. 그게 내가 외동이라서 그런지 타고난 게 이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독하게 나밖에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써보기로 했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 덜 걱정하고,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해 크게 고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처음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고 느꼈던 설렘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또 얼마나 글에 반응하는지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하나 애를 쓰는 게 있다면, 가급적 솔직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멋질 필요도 그렇게 보여야 할 이유도 없다. 이건 책을 내겠다는 마음에서도, 기업체의 서류 심사에 합격하겠다는 의지이기도, 내 물건을 잘 팔아보겠다는 야망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나만을 위한 나만의 글쓰기다.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회복'이라고까지 불러도 모르겠다. 어떻든, 글을 다시 주기적으로 쓰게는 되었다. 이걸 해야, 인생을 조금 더 재밌게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걸로 됐다. 이제 나는 글쓰기에서 어떤 실제적인 효용을 구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다시 온전히 나의 취미가 되었다. 분명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던 것에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있었다. 그 맛에, 글을 열심히 써댔다. 책 역시도 작가가 된다면 스스로가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재밌어하던 친구 하나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글쓰기로 삶을 지탱했으면서, 정작 가장 힘든 순간에는 다시 글쓰기에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살면서 겪은 고통들 중 성장통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게 있다면, 나는 글을 다시 쓰게 되기까지의 회복의 과정을 그나마 고를 테다. 이제는 안다. 글은 나를 부를 축적시킬 수도, 명예를 드높일 수도,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도 없다. 글은 무력하다. 하지만 무력하다고 무가치한 건 아니다. 글을 쓰며,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의 지금을 알고, 그러면서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다. 가능한 글 앞에서는 정직하려 애쓰며 살아있는 시간 동안 나를 가장 덜 가꾸고 꾸미려고 한다. 밖에서는 무슨 척을 하며 어떤 역할을 멀쩡히 수행해야만 하는 내가, 글을 쓰면서는 그나마 나 자신일 수 있다. 나는 내게 묻고, 나의 답을 기록한다. 그 안의 대화를 통해서 조금 더 나를 알 수 있고 내 지난날을 이해하며 내게 스스로 건네야 할 이야기를 찾게 된다. 쉽게 말해서, 글쓰기는 내게 필요하다. 오래 돌아와서 참으로 절실히 깨달은 진실이다.
오래 좋아했고, 참 길게도 외면하다가 조우한 이 친구와 이제는 멀어지기 싫다. 그냥 글쟁이로 때론 열심히 때론 간헐적으로 글을 오래 쓰고 싶다. 작가도 합격자도 무엇도 아닌, 글쟁이의 삶. 이제야 그걸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