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대로 살아는 갈 수 있다면, 그걸로 됐지
솔직히, 업데이트된 카카오톡에 나름대로 적응이 됐다. 절대 그 개악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익숙해짐을 염두에 두고 업데이트를 진행했던 것이라면 더 무서울 지경이다. 카카오톡의 이번 변화는 내가 경험했던 모든 업데이트들 중 단연코 최악이었다. 농담 삼아 인류 최악의 업데이트라고 칭했는데, 어쨌든 내가 겪은 세상에 국한하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을 것 같던 업데이트에도, 나름대로 익숙해진 상태다. 그게 절대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고 그냥 그 꼬라지에 덜 열을 받고도 살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는 중이다. 짜증이 많은 성격이라 처음에는 카카오톡에 들어갈 때마다 바뀐 지점들이 거슬리고 성가셨다. 민방위 문서까지 카카오톡 문서함으로 송달받게 될 정도로 필수적인 서비스가 되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지나치게 모자랐던 헤아림을 바보같이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 메신저 서비스를 안 쓰고 살 수는 없다는 게, 결코 죽고 사는 문제까지는 아니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것들에는 그게 언제든 시들해지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벌써 11월이 되어버린 올해에도 많은 것들이 그랬다. 곱씹을수록 아쉬운 패배로 시즌이 끝나버린 응원하는 야구팀에 대한 감정도 많이 추스러졌다. 크고 작은 사회의 비극들에 때론 일렁였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친구와 술을 마시며 함께 저주하고 욕 해댔던 어떤 일도 감정의 잔상만 남아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정말 죽고 사는 문제뿐인 것 같다.
글을 취미로 가끔 쓴다고 하면, 어떤 글이 좋은 글인 것 같냐는 물음을 받을 때가 있다. 글을 쓰기 이전부터의 고민이기도 했다. 대학에 막 입학했던 스무 살 교양수업 중 하나였던 글쓰기 강의에서 이 물음을 받은 뒤로, 좋은 글이란 무엇일지 꽤 오래 고민했다. 이제야 겨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잘 읽히는 글'이다. 읽은 문장을 되돌아가 다시 독해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시험 지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그 생각을 떠올리고 기술해 낸 사람이 고생하고 노력해서 전달해야지, 받는 사람이 애써 수고로울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가능한 노력하고 품을 많이 들여 잘 읽히게 만든 글이, 그나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지점에서 문장이 길고 짧은 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뭐든, 잘 읽히면 된다. 단문으로만 이루어진 글을 숨이 차고, 글 한 편을 이루는 문장 모두가 장문이라면 아찔하다. 때론 단문 두 개를 적절하게 연결하기도 하고, 때론 무엇인가에 대해 길게 서술하거나 형용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간결하고 산뜻하게 어떤 것을 정의하는 문장들이 조화롭게 섞여있는 글이 수월히 읽힐 수 있다. 글이 그렇듯, 삶도 마찬가지다. 너무 소소한 에피소드들로만 채워진 생애는 단조롭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대단한 일들의 연속은 피로할 뿐이다. 수월한 삶을 실현하는 건 균형이다. '중용'이라는 이름부터 어려워 보이는 미덕에까지 도달할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그나마 균형이야말로 내가 품어볼 수 있는 삶의 소박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어쩐지 올해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일들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일들로 치부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한 해가 너무 나쁘지는 않고 있다.
예전에는 매사가 죽고 사는 문제였다. 글로 비유하자면 복문의 연속인 장문이 빼곡히 들어선 상소문 같은 삶이었다. 내용면에서도 상소문과 큰 차이가 없던 게, 스스로에게는 끊임없이 통촉하라 했고 작은 고통에도 나 자신을 검열하게 만들었다. 영화 <클래식>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화의 반전 때문에 잊힌 조승우의 예쁜 말이 있다. "그땐 너무 순수했던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고 웃고..."라는 대사다. 굳이 비교하자면 나는 지금보다는 더 순수하기는 했다. 순수해서, 화도 잘 내고 아프기도 더 깊게 아팠다. 지금은 피로가 앞서고 그리 쉽게 옛날처럼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럴 시간에, 눕는다. 누워서 세상은 참 다정도 병이다,라며 대충 숨을 쉰다. 대신 무언가에 미친 듯이 열광하지도 못한다. 깊이 탐구하는 것들의 가짓수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더 새로운 감각을 원하지도 않게 되었다. 매력적인 새 음악을 찾는 것보다 익숙한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게 훨씬 즐겁다. 살면서 느끼는 감흥이 확 줄어든 느낌이다. 어느 순간부터 '애매하다'라는 말을 종종 하고는 한다. 그냥, 말 그대로 많은 것들이 애매하다. 모든 게 무가치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뛸 듯이 재밌지도 않다. 올해는 특히 그런대로의 한 해였다. 물론 이런 1년에도 감정의 등락은 주식장에서처럼 당연히 존재하여, 어떨 때는 마음을 부여잡고 울었고 또 어떨 때는 환희도 느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윗값들은 고만고만했다. 가슴 저린 애상과 하룻밤 잠 잘 정도의 기쁨 사이의 고만고만한 감정들을 느껴왔고, 나름의 균형 속에 역설적으로 세상이 조금은 살만했다.
입이 방정이라고, 아직 한 달 반 넘게 남은 세상이 급격한 지옥으로 변하지는 않기를 소망한다. 다만 너무 침울한 전례 없는 일들에 허우적대지 않는 이상, 올 한 해를 그동안 살아온 것처럼 남은 2025년을 그런대로 살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섣부른 믿음도 있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버텨낼 기술과 요령은 배워온 것 같다. 소박한 지혜로도 세계의 무너짐은 피할 수 있다. 감정들이 이전처럼 잘 기능하지 않으면서 대신 얻게 된 현명함이다. 나는 뜨거웠던 나를 잃었다. 어떤 의미로든 간절했고 모든 일을 죽고 사는 일처럼 굴어댔던 내가 이제는 없다. 어떻게 보면 다소간 태평해지기까지 된 사치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무언가에 심장이 강렬히 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자비하지 않은 시련들 정도에는 얼굴 한 번 찌푸리고 말 정도의 초연함은 지니게 되었다. 카카오톡 업데이트도 예전이었다면 아직도 이딴 업데이트를 계획하고 실행한 이름 모를 이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었을 것이다. 이젠, 그럴 힘도 없다. 전생에 엄혹한 시대를 살았더라면 악행에 동조하지는 않아도 어쩌면 방관은 했을 수도 있겠다는 솔직한 마음이 드는 요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잃어서 균형을 찾아가는 나이 듦이 꼭 나쁘지는 않다. 삶의 출렁임은 괴로웠다. 좋을 땐 좋은데, 아플 땐 끝없이 아파야 했다. 바닥까지 고통받는 것의 괴로움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덜 좋고 덜 나쁜 게 더 괜찮다. 괜찮으면 된 거다. 괜찮으면, 살아낼 만하면, 그걸로 의미 있다. 다른 의미는, 굳이 없어도 된다.
평균 수명에 대비하였을 때 단순 수치로 여생은 많이 남았지만, 이제 삶의 답안지에 뭐라고 쓸지는 정할 시간이다. 남은 인생은 그걸 빼곡히 써내기에도 바쁠 것이다. 더 자라겠다는 사람들, 더 깊이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이제야 적어낼 삶의 답안지의 제목은, '덜 아프고 싶은 생애'다. 나이가 거저 주는 몇 안 되는 교훈이 있다. 거저 주기에 받지 않으면 탈이 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염치'다. 세상에 마냥 공짜는 없다는 걸 너무 자연스레 알아야 하는 나이고, 그건 비단 물리적인 자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덜 아프고 싶은 생을 동경하고 갖고 싶다면, 내놓아야 할 것이 있다. 인어공주의 목소리 같은 거다. 반짝이고 예쁜 목소리 대신 인어공주는 두 다리를 얻었다. 날카롭고 예민하며 덕분에 뜨겁게 희열 할 수 있는 감정의 온도를 포기하며, 나는 대신 덜 아픈 날들을 조금씩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좋은 건 좋은 것대로 누리면서, 아플 때만 통증을 덜 느끼겠다는 마음가짐은 양심이 없다. 선택의 순간이 내게도 온 것이고, 나는 고점을 낮추며 저점을 높이는 균형의 방안이 더 마음에 든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최소한 내가 아픔에서 다신 아프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너무 숨 가쁘게 달리는 단문의 삶도, 너무 하나하나에 몰입하고 완결해 내려는 장문의 삶도 아닌, 적당히 꾀와 요령도 부리며 삶의 고비를 수월히 넘어가는 '잘 읽히는 글' 같은 삶이 내 남은 생애가 되기를 원한다.
굳이 뭐 새삼스럽게 뜨거웠다고 기억되는 날들에 애상의 작별을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멀어짐에 구태여 인사는 불필요한 사족일 뿐이다. 다만 그 시간을 지나 조금도 무사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내 삶의 여정을,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응원하고 싶기는 하다. 큰 노력을 기울여서 이렇게 된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고통과 슬픔은 겪어야 했다. 그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게, 앞으로의 걸음들을 잘 건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잘 읽히는 글과 같이, 잘 지내지는 삶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