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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아버린, 알아버린

나를 가장 깊이 찔렀던 건 내게 가장 소중했던 것들이었다.

by 사랑의 천문학

그렇게, 꿈도 별 볼 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시시한 날들에도 최선을 다할 줄은 알게 됐지만, 그 평범함을 견뎌내기 어려운 순간들도 많다. '찬란'이라는 말과는 확실히 멀어진 요즘이라는 걸 체감한다. 그동안 나를 떠나버린 걸 떠올리고, 내가 떠나야 했던 것들을 잠시 애도해 보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무엇이 내 삶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는 마치 이미 정해져 있던 것처럼 느껴진다. 서글픈 운명론이 더 와닿는 나이가 됐다. 앓아서, 알았다. 부서지는 것들을 애써 주워보려 애를 쓰다가 다치고 삐걱대다 보니 알게 된 진실이다. 세상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정말 너무 많다. 가지는 것도 놓아버리는 것도, 버려지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해서 멋대로만 살겠다는 건 아니다. 삶 전체는 의도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해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순간마저 유기해 버리는 건 도리가 아닐뿐더러 그 결과에 대해 불평할 수도 없게 만든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하면서 살아야 투덜댈 자격이라도 부여받는다는 염치는 있다. 하지만 어쩐지 삶이 무기력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수용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아주 환하게 빛날 수 있다는 믿음의 마지막 불꽃이 현실에 꺼져가는 초라한 시간이다. 모든 촛불은 결국 꺼지기 위해 불이 붙는 것이니, 조금 서운할 뿐이다. 곧 이 느낌에 익숙해질 거라 믿는다.


날이 춥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지만, 사실 1년은 추울 때 시작해서 추운 겨울에 끝난다. 더위가 유독 긴 한 해였다. 더위가 유독 긴 한 해는 매년 반복될 것이다. 다가올 추위에 직전의 더위는 언제나 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곧, 참 추운 날들이다,라는 말만 당분간 남을 게 뻔하다. 그건 우리가 특히 바보 같아서 잊는 게 아니라,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도 될 것들에는 굳이 목숨을 걸지 않는 지혜를 갖춘 것에 가깝다. 작년의 추위가 올해보다 매서웠니 아니니 같은 소모를 기울일 여력이 없기도 하다. 불필요한 것들에 화를 내는 불필요함마저도 잃어간다. 이것도 나이먹음의 현상이라면 맞을 듯하다. 멀고 가까운 이들의 나이 듦으로부터 공통적으로 발견한 사실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꽤나 유의미하게 무섭고 외로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소외와 점점 더 친구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불공평한 거래일지라도 나이가 주는 선물이 없지는 않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보신주의지만, 어쨌든 자신을 지켜내는 법을 더 터득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더 요령 있고 능숙하게 보호할 줄 알게 되어,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어리거나 젊었을 때 느꼈던 괴로운 감정들을 견딜 수 있게 한다. 비록 등가교환은 아닐지라도, 나는 어느 정도는 지난 시절의 뾰족함을 내어주고 얻어낸 무던함을 긍정하는 편이다. 그 뾰족함이 나를 찌를 수도 있음을 역시 앓았기에 알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버려짐이 참 두려웠다. 어딘가에 물리적으로 강제적으로 떨어져야 비로소 버려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버리는 것들은 소용 가치가 다한 무언가다. 결국 내가 무서웠던 건 나란 사람의 효용이 소진 돼버리는 일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어린 시절 어른스럽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그 맥락이었다.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안쓰러운 욕구가 가득했다. 어쩌다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타고난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다. 가족으로부터, 누군가의 인정으로부터, 사랑했던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절실했다. 결과가 매 번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어떨 때 나는 소용을 다 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자비에 인색했다. 버리고 버려지는 건 단어의 어감과 의미의 참혹함과는 다르게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슬펐다. 슬프고 슬프다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내가 절실함을 버리면, 조금만 덜 필사적이면 나는 덜 아플 수 있겠구나. 이 역시 나이가 준 몇 안 되는 현명함들 중 하나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빛나고자 하는 희망이나 지키고 싶던 꿈도 그 과정에서 함께 버려졌다. 후련하진 않았다. 다만 버려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에는 의식적으로라도 태연한 척하는 데 조금은 더 용이했다. 지금도 여전히 실망할 때가 있고, 그때마다 나를 기대하게 만든 것들을 찾아 버린다. 버림은 계속될 테고, 나는 조금씩 더 괜찮아질 것이다.


작용이 있는 곳엔 반작용도 존재한다는 진실이 좋다. 현실을 이해하기에 이만한 게 없다. 나는 많은 것들을 버렸고, 덕분에 버틸 수 있었지만 대신 시시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 무언가에 쉽게 가슴이 뛰지 않는다. 그나마 마음이 동하는 순간이 있다면 현실 속 차가운 계산이 나름의 수지를 보일 때다. 어른이 되긴 됐는데 너무 어른이 되는 중이다. 다만 아직 완연하지는 않은 서툰 어른이다. 계속해서 나를 체념시키며 되뇌인다. 덜 아픈 게 내게는 우선이라고. 빛나고 생기 있는 시절을 꿈꿀 나이는 이제 아니라고, 그렇게나 괴로웠으면서 아직도 모르냐고 나를 채근하기도 한다. 참 멋진 시간이 내게도 있었고, 더 멋진 날들을 꿈꾸던 밤들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는 한때라고 불러야 하는 그날들이다. 한때는 소중했던 것들이 많았다. 그들 중 다수를 버렸고 역시 버리는 중이다. 그래야 어떤 버려짐에도 나를 지킬 수 있다. 나는 날 잘 안다. 내가 많이 위태롭고 나약하기 때문에, 생의 고비마다 유독 힘들어할 수밖에 없다. 삶이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역경은 당연히 버려짐이다. 그런 조난에도 나까지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절실하고 소중한 것들이 마음 안에 많이 없어야 한다. 버려짐이 무서워 나를 버릴 수 있는 것 자체를 줄이는 부지런한 어리석음이다. 바보 같지만, 이게 나를 보듬을 수 있는 방안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도전도 좋고 패기도 좋고, 모험도 참 멋진 단어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동경하는 건 그들이 주는 '찬란함'이 아니다.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진심 어린 혹은 의례적인 인사가 특히 많이 오가는 요즘이다. 지난 것들을 정리하고 다가올 한 해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차분한 분주함이 주위에서 많이 목격된다. 지난 시간에 후회가 크지 않고 다가올 날들에 기대도 많지 않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이 시기를 맞이한 듯하다. 사람들은 내게 더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꿈을 꾸거나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고마운 이야기지만, 이만하면 됐다. 지금 내가 살아내는 것보다 더 멋진 삶은 분명 있다. 내가 더 치열하게 노력한다면 어쩌면 닿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러나 그걸로 삶을 견뎌내고 싶지는 않다. 내게 필요한 건 더 멋진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그래도 버텨낼 정도는 된다는 확신이다. 삶의 동력보다는 나를 이곳에 붙잡아둘 중력이 더 시급하다. 안녕을 고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저기 어딘가 나로부터 버려진, 한때 참 예뻤던 마음들이다. 가지고 있으면 마음은 환하지만 그뿐이기만 해서 버려야 했던 것들이다. 언젠가 나를 버리고 나는 다시 상처를 받을 거고 깊이 우울하게 된다. 마음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마음을 다치지 않게 돌보는 일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중요한 걸 선택할 수밖에 없다. 버려야 했던 그리고 버려야 할 것들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모자란 변명을 건네는 이유다.


오래 앓아서, 너무 알아버렸다. 나를 가장 깊이 찔렀던 건 내게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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