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절망과 추운 세상과 그래도 나는,

글을 통해 그때의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

by 사랑의 천문학

면허 없는 내게 글은 자동차였다. 그 차를 타고 지난 나를 면회 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붙잡고 예전의 나를 마주했다. 앙상하게 날 선 청춘이 그곳에 있었다. 초췌한 젊음이었다. 어디 하나 빛나는 구석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서늘하게 매몰찬 젊음이기도 했다. 겨우 건넨 손에 돌아온 건 당연한 냉대였다. 그렇게 두었으면서 무엇하러 다시 찾아왔냐며 그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렇게밖에 두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에는 전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내게 못됐어서 잘못했다는 화해를 청하는 건 몰염치한 짓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영혼이 야윈 젊음이 이제야 겨우 나아진 내게 보인 건 환멸과 조소였다. 요란스러울 정도로 우당탕탕 그 시기를 보내고 겨우 된 게 이딴 모습인지를 비웃는 듯했다. 그러게, 겨우 이 정도로만 살겠다고 나는 그 시절의 당신을 그토록 괴롭혀야 했다. 그 서러운 젊음 앞에서 이 정도라도 나아진 걸 보이는 건 크게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마주한 두 얼굴 사이에는 불편한 침묵만 감돌았다. 참 저렇게까지 스스로에게 모질 필요는 없었는데, 나는 뭘 위해 내게 그렇게 가혹했던 걸까. 그래도 덜 아픈 건 지금의 나였다. 용기를 내야 하는 것도 지금의 나란 소리였다.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가서, 가엾은 젊음의 등을 어루만지고 토닥였다. 잘못이었다고 했다. 그 젊음을 모나게 일그러뜨려 너무 미안하다는 말도 보탰다. 어렸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그뿐이었다는 초라한 진실을, 헤아리지는 못해도 알아만 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빛나지 못했던 젊음의 흐느낌이 아팠다. 빛날 수 있다 믿었던 역사의 부서짐의 파편은 내게도 날카롭게 튀었다. 많이 절망했던 젊음이었다. 내 젊은 시절의 절망은 이후의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며 더욱 깊이 곪았다. 나를 아끼는 것에 가장 서툰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게 제일 모질었다. 어떤 막다른 상황에 놓였을 때, 정작 나 자신이 스스로의 구원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사람이 가장 외로워질 때는 삶에 퇴로가 없다고 느껴질 때다. 퇴로가 없어도 너무 없던 날들에 나는 나를 차갑게 몰아세우며 채근하기 바빴다. 내가 내게 가장 잘못했던 짓이었다. 나는 나를 안아줄 줄 몰랐다. 뻔뻔하게 그럼 좀 어때,라며 나를 지키는 법에 무지했다.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랬다. 스스로를 보듬을 줄 모르는 젊음이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못나게만 보이는 청춘을 꾸짖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쉽게 건네지는 위로의 말을 나 스스로에게만큼은 전할 수 없었 지난날이었다. 내가 대단히 윤리적이고 올곧은 사람이라 스스로에게 엄격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가 만만했을 뿐이었다. 자존감이 낮아서였다. 그 어떤 문제든 나의 귀책으로만 보였다. 결국 문제는 나 하나라는 생각이 나를 아프게 찔러댔다. 생각해 보면 그런 습관부터 먼저 버렸어야 했다. 어떤 순간에든 나를 지키는 연습을 그때라도 했어야 했다. 이제 와 후회하는 지점이다. 내게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나의 울음을 타박만 했다.


글을 매개 삼아 나를 반추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가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당시 너무 외롭게 혼자 두었던 내 젊음을 마주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두고 가거나 버리고 간 무언가가 여전한 순애보로 떠나버린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잘 안다. 가뜩이나 상처받은 내 젊음은 그 사이 상상할 수 없는 원망까지 게걸스럽게 먹어댔겠지. 그 우악스러움이 무서워 나도 지난 시절의 나를 마주하는 걸 오래도록 피해왔다. 소설이 아닌 이상, 아니 심지어 아주 먼 훗날을 가정한 소설이라도, 결국 글을 쓰는 사람 본인의 사고와 경험을 반추한 내용 위에 작성될 수밖에 없다. 글이라는 매체의 팔자가 그렇다. 글을 다시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그래도 이제는 살만하다는 소리였고, 그러니 이젠 지난 시절의 나를 마주해 보겠다는 나름의 용기였다. 나의 아픔에 대한 글이 처음부터 쉽게 쓰인 건 아니었다. 그래서 때론 음악을 또 때로는 영화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을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분명히 하나를 먼저 하자면, 지금의 나 또한 완전하거나 완벽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 죽을 때까지 나는 불완전하고 때로는 비참까지 한 생일 살아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라는 핑계로 나와의 화해를 마냥 미룰 수는 없는 셈이기도 하다. 끝까지 나는 이 모양으로 살 것이지만, 그곳에 고여있는 내 젊음은 더 고통받을 테니까 말이다. 치유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고, 나는 다만 내 미안함이라도 전하고자, 조금씩 그때의 내게 글로써 다가갔다.


그 큰 울음을 잠깐의 눈물 훔침 정도로 치부했던 어린 날을 반성했다. 더 울어도 된다고, 더 크게 울어도 된다고 나를 위로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내가 내게 그 어떤 작은 위안도 못 됐다. 내게 괜찮다고 하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아도 결국 삶의 법정에서 주심은 나였고 그들의 탄원을 모두 기각했다. 내 잘못으로 상황이, 생이, 그리고 마음이 아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음에도, 나는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나는, 여전히 멈칫거리지만, 내가 얼마간의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를 겨우 지면에 적을 수 있다. 나를 집어삼킨 괴물 같은 그 우울의 구체적 이름을 하나씩 명명하는 건 여전히 겁이 난다. 아파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나는 세상 어느 유능한 상담사 부럽지 않게 그들에게 진심으로 따스한 다정함을 전달하려 애썼다. 정작 내게는 그러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나의 위선에 나의 젊음이 느꼈을 배반감이 컸을 테다. 힘든 날들에 힘을 내지 못한다며 나는 내게 차갑게만 굴었다. 다소간의 멈춤이나 방치를 그 와중에도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글을 통해 겨우 지난 내게 닿았을 때, 최초에 마주한 그의 비웃음이 이해되는 이유다. 그렇게 가까스로 해내고 이겨내며 살아왔는데 겨우 이런 모습이라는 게, 아마 어렸던 내게는 더 아픈 지점일 수밖에 없을 테다. 이렇게나 지루하고 시시한 삶을 살기 위해 그렇게 아파야 했냐고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말의 평범함이야말로 어린 내가 간절히 갈구했던 무언가였다. 그래서 글이라도 써 볼 용기를 낸 것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이루었다는 면죄부는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등 뒤에서 짙게 내뱉는 한숨이 들리는 듯했다. 그 시절의 나는 금연을 하지 않기도 하였으니, 어쩌면 젊은 나는 씁쓸함에 담배를 한 대 물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마 그 모습까지 마주할 자신은 없어서, 그냥 뒤돌아보지 않고 얘기했다. 웬만하면 살아보겠다고. 아니 사실, 그 말을 정말 입 밖에 내뱉었는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나도 자신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렇게 견뎌낸 내 젊음이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구했다는 서사는 만들어주고 싶다. 나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했다는 이야기를 10년 뒤에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볼 생각이다. 어지간하면, 살자고. 겨우 살든 어떻게든 살든 뭘 하며 살든 일단은 살기는 해보자고. 그러니까 사실 이건 고백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다짐이다. 이제 스스로를 지난 10년간 그랬듯 마냥 아파하게만 두지 않고, 아파하게 스스로 찌르지는 않을 거다. 물론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연약한 결심이고, 실제로 흔들리는 날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1년 간 글을 쓰며 젊은 나를 만나고 그때 느꼈던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쉽게 잊지는 않으려고 한다. 세상이 춥다고 그 추위를 당연히 앓지는 않는다. 절망이 삶에 만연했더라도 그게 계속 이어질 필요는 없다. 대단히 극적인 변화가 있지는 않겠지만, 내가 나를 덜 탓하며 조금이라도 더 요령 있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그 정도면 글을 통해 지난 나를 마주하고 온 여정이 단순히 죄책감과 후회가 아니라 보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성취의 경험이 내게 조금씩 더 견딜 힘을 줄 거라 믿는다.


한없이 절망만 했던 시기가 있었다. 조금 덜 절망하는 지금이 찾아왔다. 단순한 일직선 그래프처럼 앞으로도 그렇다면 좋은 일만 있을 거란 기대는 없다. 그때 내 잘못이 아님에도 아파야 했던 순간이 찾아왔던 것처럼, 내 노력과 최선의 결과물이 아닌 지금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어떤 우연과 임의의 순간에도, 나는 최소한 지난날들보다는 내게 덜 모질고, 나를 덜 타이르며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하고자 한다. 힘없이 웅크린 내 어린 시절의 어깨를 어루만질 때, 나는 이것이 내가 갚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확신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앓아버린, 알아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