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서야 말하지 또 언제 말하겠어요
한 선수가 광고에 나와 야구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이런 형태의 좋아함도 있는 거겠죠,라고 나는 속으로 답했다. 그대들이 날마다 창의적이면서 신선한 방식으로 실점을 하고 아웃을 당하는 것에서 나는 언제나 배운다. 세상에 같은 아웃은 없다고. 그러니 이렇게 날마다 화를 내고 열을 받으면서 좋아하는 것도 분명 좋아함은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방식이 기괴하고 과격할 뿐. 생각해 보면 야구는 영감의 샘물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기 시작한 야구임에도 아직도 야구를 보면 즐겁고 그 이상으로 아쉽고 화가 난다. 하필이면 게임 수도 많아서 밤마다 나도 모르게 중계를 어디서든 보고 있게 되는데, 그 많은 게임들 중에서 좋은 감정만 처음부터 끝까지 간직하는 쾌적한 경기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경기 시간도 짧은 편이 아니라 아쉽게라도 지는 날에는 열대야와 겹쳐 가끔은 잠을 설치게까지 된다. 대체 오늘 경기는 누가 문제였을까라며 의금부장처럼 모질게 역적을 색출하고 메아리 없는 추궁을 해대다가, 어느덧 사실은 이딴 팀을 믿은 제가 죄인이었다며 가련히 고해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다 경기 상황은 너무나 다양해서 나의 얕은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를 꽤 자주 목도하게 되고,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이딴 스포츠를 만든 거냐며 괜히 이름 모를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다음 날, 경기 한 시간 전에 팀의 라인업을 확인하고 선발 투수의 운세를 살핀다. 확실히, 비상식적이고 지랄맞으며 대단히 유난스러워지는 스포츠다.
선수가 잘하면 선수의 연봉이 오르고 선수가 인기가 많아지며 선수가 <유퀴즈>에 나오고 선수가 대중의 사랑을 받을 뿐이다. 선수가 국민타자가 되든 뭐가 되든 나는 그저 일개 국민으로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위치에서 벗어날 일이 없다. 선수들이 경기에서 날아다닌다고 내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단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중계를 보고 때가 되면 야구장을 찾아 땀에 젖도록 응원한다. 한 시즌에 가장 잘하는 팀의 승률이 보통 60% 언저리다. 그러니까 나는 많아봤자 60% 정도의 확률에 그날 밤 나의 기분을 베팅하게 된 셈이다. 나머지 40%는 그리 작은 수치가 아니고, 무엇도 얻지 못한 저녁으로 귀결되는 날들도 참 많다. 그럴 땐, 그렇게나 출근하기 싫다며 투정을 부려대는 회사조차도 때가 되면 월급이란 걸 주면서 일주일 정도는 나의 짜증을 낮춰주는 시늉은 부린다는 억지 논리로 더욱 야구를 미워하려고 애쓴다. 전혀 안 미워지기에 부질없는 노력일 뿐이다. 그렇기에 못된 야구는 나의 사정을 가리지 않는다. 야구는 정말 잔인할 수 있는 스포츠다. 지치고 힘든 날 더욱 극심한 짜증까지 얹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껏 기대하며 모든 자료를 제출한 연말정산이 알고 보니 추가 납부인 듯한 황당함을 야구를 보며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런 스포츠를 좋아하는 게 맞나. 아니, 이런 좋아함도 좋아함이 우선 맞은가. 그러나 나에게 가끔 모진 순간이 있었다고 나에 대한 누군가의 사랑의 총체가 부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야구에 대한 내 마음도, 굳이 변명하자면 마찬가지다. 물론 모진 걸 넘어서 험할 때가 있어서 문제지만.
야구를 좋아하냐는 광고의 질문에 그럼에도 차마 '아니요'를 할 순 없는 건, 안타깝게도 내가 이 스포츠를 '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줄리엣을 사랑했던 로미오의 마음보다 조금만 덜하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귀한 생명을 내놓을 일이 없다면 굳이 야구를 끊지도 않을 팔자다. 순애보라기보다는 열광에 가까운데 이 광적인 마음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런 열정으로 다른 생산적인 일을 했다면 화성까지의 발사체나 전기 자동차 같은 건 아니어도 뭐라도 하나 인류에 기여했을 것 같은데.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따지자면 내가 이토록이나 열정적으로 몰입할 건더기가 야구 말고는 없었다. '축구'는 유럽의 '종교'라고 하는데, '야구'는 미국의 '상징'이라고 한다. 상징은 언제나 걸어놓는 무언가다. 생활이라는 소리다. 날마다 열리는 경기라는 점이 야구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자 최악의 단점이다. 경기 자체는 정적일 때가 많지만, 그래서 플레이가 일어나는 귀한 순간에 대한 몰입과 집중 그리고 그 결과에 교차하는 희로애락이 야구를 끊을 수 없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금연을 성공 중인 사람의 입장에서 야구는 그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도파민이다. 이건 내 경험의 빅데이터가 증명하는 소중한 뇌과학적 임상이다. 지고 있던 경기에서 주자를 하나 둘 차곡차곡 기적처럼 모으고, 그 모습을 갸륵히 여긴 야구의 신이 역전을 허락했을 때는 정말 지구의 종말이 내일이든 당장이든 일단 내가 즐거우니 됐다는 마음까지 된다. 그런 내 모습이 인류 문명적으로 봤을 때 다소간의 한심함을 띨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영장류로서의 야만성을 인문학적 교양으로 해소하라는 의미에서 세상엔 스포츠가 있다. 내겐 그 스포츠가 야구다.
살면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을 잠깐이라도 내게 줄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야구는 단순히 좋아할 만한 스포츠가 아니라, 격식과 품위를 가식으로라도 따져대는 나 역시 '존나'라는 속된 표현을 쓸 정도로 매력적인 스포츠인 셈이다. 물론, 세상 행복을 다 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혹은 그보다 큰 무언가를 앗아갈 수도 있다는 구절과 동의하다. '비정한 승부'에 야구도 예외가 아니고, '공은 둥글다'에 유난히 우리 팀이 자주 해당되고는 한다. 그래도 야구를 위한 변명을 해보자면, 나쁘기만 하는 날만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건 어느 스포츠든지 그러겠지만, 절대적인 경기수가 많기에 나쁘지는 않은 날의 수 역시 자연스럽게 크게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당연하게도 열받는 날들이 더욱 압도적으로 많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적이 가능하지만, 그런 합리적인 수준에서의 토론이 가능했다면 애초에 '존나' 좋아하지조차 않았을 테다. 또한 야구를 통해 인생을 배울 수 있다. 물론 배움의 내용이 비극일지 희극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비극이 있으면 희극도 있고 당연히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를 때론 환희에 때론 눈물에 느끼게 된다. 가끔은 사람이 뭘 굳이 배우기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무언가를 즐기고 보며 삶 전체를 체감할 수 있는 건 아직까지는 야구가 유일하다. 자주 경기가 있고, 시도해 볼 기회가 주어지며, 실제로 경기 중 찾아오는 기회가 보통 적지만은 않다. 위기를 힘겹게 넘기면 종종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게 상대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렇게 상대방처럼 내 인생을 침범하는 것들도 많기에, 더더욱 야구는 인생의 압축판이다.
스토브리그까지 어느 정도 정돈된 2월은 야구 경기와 소식의 보릿고개다. 올해는 잘하겠지라는 마음과 올해라고 뭐 다를까라는 의심이 교차하는 설레는 시기이기도 하다. 팬의 입장에서 우리 팀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먼저 보이게 되고, 이걸 남들도 다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이런 팀으로 어떻게 한 시즌을 보낼 수 있을까 암담하기도 하다. 그래도 너무 큰 별일이 없다면 우리 팀은 성적이 어떻든 한 시즌을 완주할 것이다. 주축 선수가 부상을 당할 수도 있으며 믿었던 에이스가 어쩔 땐 부진할 수도 있다. 그래도 누군가가 그 차리를 메우고 또 누군가는 기대치에 부응하는 데 실패하며, 기대 이상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저조한 패배자로 한 경기씩 묵묵히 견디고 버텨 시즌의 마지막에 이를 나의 팀이다. 어쨌든 1년을 수행한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이 속에서 뭉클한 감동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그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여 우승을 다퉈볼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누구도 모른다'는 게 핵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차라리 난 그에 대한 예지력은 같은 기간 미국 주식 등락률을 예언할 수 있는 사람과 맞바꾸고 하루하루의 치열한 승부에 내 도파민과 긴장감을 맡길 테다. 이 재미를 도무지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작년 한 해 가장 인상 깊었던 광고 문구는 '야구, 적당히 좋아할 수 없는 스포츠'였다. 적당하게 살고 싶으면 어쩌면 야구는 좋아해서는 안 되는 스포츠다. 그러나 우린 몸에 나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뭐든 적당하게만 사는 삶은 재미없잖아!"
개막 후 일주일도 안 되어 두고두고 후회할 말이지만, 그렇기에 지금이야말로 외친다. 야구가, "너무" 보고싶다. 그리고 시즌 중에는 아마 무척이나 하기 힘들, '야구야, 나 네가 정말 엄청나게 좋다'라는 말을 야구에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