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남겨지지 않을 그 이름들에 진심어린 응원을
소박한 윤리의 진실도 따르지 않는 현실이 내 입맛 같을 수는 없다. 다 그런 거고, 원래 그런 거다. 그랬으면 좋겠고 그래야만 하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세상은 세상대로 지나가고 우린 우리대로 하루씩 생을 더한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혹은 그 둘 무엇일 필요도 없는 시간의 흐름만이 세상의 정직한 일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 삶의 대부분의 영역은 애초에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다. 생을 견디는 게 어려운 이유다. 언젠가 세상살이가 원하는 대로 되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면 재미가 없지 않겠냐는, 어쩌면 꽤나 진심을 믿는 이들에게는 감흥이 있을만한 소리를 했던 어릴 적 누군가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진심보다는 진실을 믿었다. 한낱 축구 게임에서도 억만장자 구단의 구단주 놀이를 하며 닥치는 대로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가난한 구단을 승격시킬 때 몇 배 이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역경을 이겨내는 삶만 재밌는 게 아니다. 모든 걸 해내고 이뤄내며 실패 따윈 마주하지 않는 더 재미있는 인생을 다만 살아보기 어려울 뿐이다. 학창 시절 교실 뒤에 꽂혀있던 책들 중에는 위인전이 많았는데, 지나치도록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저 책들 중에 이름을 올리려면 전 재산을 기부하거나 인류에 헌신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였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주어진 현실에 굴하지 않고 절박하게 삶을 개척해 낸 인물들이었다. 위인전에 수록된 인물들은 꽤나 많았고 업적도 다양했다. 그리고 세상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기억조차 되지 않는 이름들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한다.
내 흔한 이름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지겹도록 평범하고, 감사하게 평범하다. 사치스럽게도 평범함을 지겹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가 돼서 다행일 뿐이다. 서글프고 저밋한 사연의 생성이 중단되고 비루한 곤궁함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갈구했던 평범함인지 모른다. 오늘을 투정하고 내일에 짜증을 내며, 적당한 불평과 그럼에도 힘없는 우스갯소리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축복이다. '남들 다 그렇게 살아'의 '남'이 되어, 정말 남들과 같은 직장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위인이 될 수 없다. 재능도 없고 돈은 더 없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기는 무슨, 언젠가 지금의 평범함을 지탱하는 회사원의 지위마저 박탈당하면 소외되고 잊히다 생을 마무리할 테다. 비관적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나이까지 멀쩡히 회사 생활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그나마 성공한 케이스라고 보는 게 적확하다. 평범하기 도달하기 위해서 때로는 죽을힘을 다해야 하는 시기에 죽을힘 보다 조금 덜한 노력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건 정말 다행이다. 거창한 걸 꿈꾸지 않으니 대단히 실망할 일도 드물다. 언젠가의 나에게는 이루거나 해내고 싶은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인은 못 되더라도 살면서 다다르고 싶은 목적지들이었다. 사랑이든 꿈이든, 낭만에 생을 걸던 시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철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의 높은 심장 박동을 어떻게든 해소하려고 애썼던 모습이 되려 기특하다. 아주 뜨겁진 않았지만 너무 게으르게만 젊음을 유기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날들이 있었기에 위인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조연으로 세상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에 대해 벌써부터 미련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의 관성은 꽤나 강력하고,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내게 무슨 일이 있든 없든 세상은 멀쩡했고, 혹시나 내가 없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그럴 것이다. 막을 내리는 건 나의 생이지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세상은 나의 삶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은 주체적이지만 오만하고 다소간의 자의식 과잉적인 측면이 있다. 세상은 세상인 게 맞고, 나는 그 안에 거처하는 한 인물이다. 그러면서 여러 고민을 하고, 깊은 슬픔도 느끼며, 치열하게 도전도 해보고 그 모든 고민, 슬픔, 도전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의 사랑도 하게 된다.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타성에 젖은 이의 면죄부로까지 악용되면 안 되겠지만, 꼭 무언가가 되겠다 하여 그게 될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어렵게 어렵게 하루씩 살아가며 때론 나아가고 때론 물러나는, 그래서 나중에 돌이켜 보면 겨우 반 보 정도 전진한 생의 빛깔이 실은 찬란함일 수 있는 법이다. 나는 그런 버텨내는 삶에 조금 더 마음이 쓰인다. 삶엔 필연적으로 아픔이 따르니 버텨냄이란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포기가 애틋하다. 손을 쥐려 동원되는 힘보다 다시 놓을 때 사용되는 힘이 훨씬 더 강하다고 믿는 편이다. 굳이 따지자면 포기에 수반되는 노력이 마음을 알싸하게 만든다. 포기는 애씀을 그만하는 게 아니라 애를 써서 관두는 행위다. 당장 깊이 사랑했던 누군가와의 시간을 단념할 마음을 먹을 때도 얼마나 괴로운 힘듦이 필요한가. 사랑뿐만 아니다. 희망과 꿈으로 생은 견뎌지지만 둘이 무너질 때면 삶도 때때로 같이 붕괴된다. 포기란, 그럴 줄 알면서도 희망과 꿈을 거둬 무너지는 삶의 건축물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일이다. 그러고도 살아내는 인생이, 바로 '버텨냄'이다.
어쨌든 포기하지 않아야 위인전에 이름을 올릴 확률이 올라간다. 그러나 고작 자신의 생 하나를 견뎌냈다고 위인이 될 일은 없을 테다. 나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만 생을 살아갈 것이기에, 여기에는 공동체의 공리 및 행복 증진을 위한 선의의 흔적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 게 아니다. 한 생애는 그러기에 살아야겠다는 능동보다는 그럼에도 살아는 갈 것이란 다소간의 수동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을 어디에 바치고 기여할지 알았고 그것을 실천해 냈다. 그들이 대단한 건 견디고만 있어도 어려운 생을 어떻게든 앞질러 멀찌감치 더 전진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지금의 평범한 현실도 충분히 너무 버겁다. 끔찍하지 않은 현실도 벅찰 수는 있는 법이다. 이마저도 어려우니 내 이름은 위인은 못 될 이름이다. 하지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던 말의 출처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다. 그러니 내 이름은, 오래 남겨질 필요 따위 전혀 없으니 그저 충분히 주인으로부터 충분히 보듬어지는 무언가이기를 바란다. 나 자신을 아끼고 싶다는 이야기다. 쉽게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포기라는 그 힘든 결정을, 포기가 필요한 순간들에 최대한 주저하지 않으며 나를 포기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다. 생이 나를 매섭게 윽박지를 때, 내가 가장 외로웠던 건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해서였다. 위인이 될 팔자도 아닌데 억척스레 또는 바보같이 무언가를 붙잡으며 정작 중요한 걸 놓치지는 않았으면 한다. 포기는 퇴로다. 다신 어디로도 빠져나올 곳 없는 삶의 미로에 갇히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생은 너무 임의적이라 그게 내 희망대로 되는 건 아닐 테고, 다시 그런 순간이 와도 내가 나를 지켜내기를 바란다.
어릴 적 독후감 숙제가 꽤나 있었다. 책 읽기도 귀찮은데 독후감 까지라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밀린 독후감엔 만만한 게 위인전이었다. 제대로 읽진 않아도 어쨌든 그 사람이 뭔가를 이겨내서 훌륭하게 살았을 테니, 대충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살겠다고 쓰면 숙제가 끝났다. 읽은 책의 이름만 바꿔대는 꼼수로 숙제를 제출한 적이 많았다. 그런 알량한 요행과 잔머리로 살기에 삶의 숙제는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너무 고단하기도 하여, 어쩔 때는 존재의 당위조차 망각해 버릴 때가 있다. 후대에 영원히 남을 불멸의 이름이 되어, 후세 누군가의 성의 없는 독후감이 될 역량과 재력 모두가 내게는 없다. 나는 너무 나만 알고, 나밖에 가진 게 없다. 그러나 남겨지는 이름만 대단하고 멋진 인생일 수는 없다. 이름이 기억되는 극소수의 인물들이 있다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우리를 책망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우린 우리다. 우리 대부분의 이름은 반드시 언젠가 사라지고 잊히겠지만, 그게 꼭 허무나 무의미는 아니다. 그 이름이 존재했던 시간 동안 우리가 우리를 지켜내기 위해 부단하게 기울였던 노력들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덧없이 휘발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내렸던 순간의 선택들과 조금 더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귀 기울였던 마음들이 생이 지속되는 동안의 우리의 날들에 적당한 온기를 줄 거라 믿는다. 위인은 못 되는 평범한 삶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그러나 이들이 겪어내는 하루의 무게마저 적을 순 없다. 세상은 대부분 그 하루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덧 저녁이다. 다시 하루가 찾아온다. 이런 반복에서 우린 우릴 지키고, 우릴 지키는 우리가 서로를 지키며 무심한 세상은 겨우 살만한 곳이 된다.
고생과 수고로 하루를 보냈던, 언젠가 잊힐 남겨지지 않을 이름들이 내일도 무사한 하루를 보내기를 응원한다. 무탈하고, 또 무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