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얘기해 보는, 우리 삶에 전무했던 '실패에 대한 교육'
참 별 것들 아닌 게 생을 흔든다. 지나고 보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렇게까지 무너질 필요는 없는 일들이었다. 그렇더라도 다시 돌아갔을 때 태연할 자신은 없다. 그 당시에는 그럴만한 일들이었으니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런 거다. 세상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있고, 어찌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문제인 셈이다. 부정할 수 없는 생의 한 구석은 '불가피'다. 이 세상은 조금 투덜거리자면 어쩔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지키고 싶은 것들을 영원히 지켜낼 수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마음을 기어코 이뤄내기도 어렵다. '학창 시절'이라 부르는 시간 동안 내가 받아낸 교육에 대해 굳이 불만이 있다면, 세상의 모짊과 잔인함에 대한 언질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철없이 공부만 해댔던 나는 세상이 이토록이나 뜻대로 안 되는 곳일지 몰랐다. 노력한다고 다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몰랐다. 무지에 의해 세상을 우습게 봤다. 사랑도 쉬울 줄 알았다. 마음을 다하는 진심도 실은 버려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정도는 알 나이인 지금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실패는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의 하나의 모습이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재앙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패를 맞이해 낼 준비가 어떤 사람이든 다 되어있는 건 아니다. 사람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그 준비 정도가 더욱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삐뚤어지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실패'에 대한 면역을 길러주려는 노력이 애초에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실패와 관련된 교육이 충분한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역동과 성장, 그리고 당연한 최선과 노력만을 주구장창 이야기해댔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실패에 대해 제대로 들은 게 없어서, 살면서 겪게 되는 실패들에 더욱 서툴게 대해야만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맘처럼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들이 더욱 많은 세상이다. 어설픈 신념이지만, 나는 교육이라는 건 성실하고 건강한 사회인을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전달 이전의 문제다. 언제나 목표를 위해 당차게 노력하는 인재상도 훌륭하다. 역경이 찾아왔을 때 딛고 일어서는 사람도 아주 멋지다. 하지만 훌륭하고 멋진 것 외에 생에는 중요한 게 있고, 그건 그런대로 평탄하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과 용기다. 화려한 성공과 엄청난 극복이 아니라, 담담한 인정과 수용 그리고 그럼에도 생을 버텨내는 게 더욱 가치 있진 않아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돌이켜 보면 내가 받았던 교육은 실패를 버티고 견디는 능력을 충분히 함양시켜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성장해야 알게 되는 게 분명 있다. 하지만 면역을 기르는 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느끼고 공감해 보면서 가능하다. 어떻게 말하자면 실패감수성을 깨우고 활성화시키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가장 아쉬움을 많이 느꼈던 건 '문학' 교육이었다. 솔직한 고백으로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시를 저주하면서 문제를 풀었다. 시를 접하는 모든 시간이 무의미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를 배우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교훈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건, 생이 힘들 때 시를 둘러볼 수 있도록 시의 매력을 알려주는 것 아닐까. '문학' 교육의 지향점은 문학을 친구로 두는 데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어렸을 적의 열렬했던 사랑이 마무리되고 이런저런 시들의 구절들로 치유받으며 나는 시가 생에 도움이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서야 시의 소용을 체감했다. 그 구절들로 이별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얻고, 나만 이렇게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망은 아니지만, 가끔이라도 이렇게 사랑에 슬픔에 대해 논하는 이야기들을 자라며 들을 수 있었더라면 싶어 아쉬웠던 적이 있었다. 이별에 대해서 미리 상상해 보고 이와 관련된 감수성을 키우며 더 담담히 사랑의 실패를 마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다.
이제 그 정도는 알 나이니까,라는 말을 가끔 할 때가 있다. 실패와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세상이 뜻대로 되는 곳이 아니라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미리 충분히 들어봤다면, 그 나이가 조금은 먼저 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나는 모자라고 철없는 사람이라 그렇게까지 획기적인 차이가 있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세상을 상상함에 있어 어느 한 구석에 '실패'를 두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세상에 실패가 있다는 건 슬프다. 하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슬픔이 발생하는 시공간이다. 그런 일들은 우리를 예고 없이 찾아오고, 삶을 물어뜯는다. 그러나 최소한의 경고 표시라도 봤다면 우린 조심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까지 졸업한 마당에 식견 없는 내가 이 나라의 교육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다만 내가 세상살이에 서툴고 능숙지 못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던 실패들에 대해 비겁하게나마 책임을 전가해 보는 것이다. 삶을 멋지게 살고 생을 개척하는 데 나는 도무지 소질이 없다. 그러나 많은 실패와 절망을 겪으며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데 노력을 많이 기울이기는 했다. 거기에, 살아가며 언제든 비슷한 좌절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이제 이 정도는 알 나이가 됐다. 이제야 된 나이다. 조금 빨리 이를 알았더라면, 어쩌면 내 세상도 조금은 수월했을까.
알려주지 않아 모르는 게 많았던 지난 시간이었다. 절망이 찾아왔을 때 생이 유독 비참해졌던 건, 내가 너무 실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를 환대하기보다는 주로 내게 매정할 것이고, 절망은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조금 더 면역을 가질 수 있었을까 싶다. 실패해도 괜찮다, 일어나면 된다, 더 성공하면 된다, 따위의 격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필연일 수밖에 없는 절망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생을 견디고 버티는 감정 근육에 대한 훈련이 나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소리다. 겪어야만 아는 게 많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도 연습을 할 수 있는 매체가 교육이다. 많은 걸 배웠지만 중요한 걸 얻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가 받은 교육에 내려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내가 들여다본 교과서엔 절망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좌절이란 꼭 찾아오는 아픔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막상 그런 실패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나를 보듬고 토닥일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생략된 채 전달됐다. 마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들의 결말처럼 '이겨내야 합니다'로만 끝났는데, 막상 찾아온 절망에 나는 두렵고 압도되어 전쟁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나도 세상이 친절하고 따뜻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이라, 동시에 세상은 차갑고 모질 때가 더 많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진실은 비단 나만 느끼는 건 아닐 테다. '이제 그 정도는 알 나이'쯤 되면, 피부로 먼저 느끼게 되는 괴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 정도는 알 나이에 도달하기까지 한 사람은 너무 많은 아픔과 서러움을 준비 없이 겪어야 한다. 이 정도로 세상이 어려울 수 있다는 걸 미처 배운 적 없어 몰랐기 때문이다. 자식이 넘어질 걸 알면서도 부모는 몇 번이나 아이들의 자전거를 가르치며 어느새 손을 놓고는 한다. 넘어지길 바라는 게 아니라, 넘어지면서 느끼고 배우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일 테다. 실패와 좌절도 마찬가지다. 그 존재를 인정하고 교육하는 건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조금이라도 능숙하게 생을 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프고 낯설겠지만, 그러면서 면역이 길러지고 어느새 생을 무너뜨리려는 것들에도 삶은 비로소 덜 고통스럽게 버텨질 수 있다. 노력과 성공만큼 중요한 건, 삶이 매몰차게 휘청여도 견뎌내고 버텨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