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가며 너무 애쓰지 않기

어찌할 게 너무 없는 세상에서

by 사랑의 천문학

통증이었던 날들에도 열정이란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꽤나 젊음을 열심히 앓았다. 그 어떤 삶의 찬송가도 저주처럼 들리는 시기가 있다. 청춘의 열병이라는 식의 아름다운 성장통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지나버린 시절은 대체로 꽤 괜찮았다고 미화되며 퉁쳐지는 경향이 있다. 그건 그때가 정말 예뻐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그날들에 중요했던 것에 골똘히 고민하지 않게 된 우리의 무심해짐이 기능한 결과다. 어쨌든 살아있다면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당면하게 된다. 지난 일들에 매몰되어 있기에 삶의 과제는 끝없이 던져진다. 자연스레 과거는 '그때'라는 두 글자로 구체성을 상실한 채 보관된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섬뜩한 기억인 얼마 전까지의 20대 동안의 날들은, 너무 아픔에 많이 몰두했던 시간이었던 게 맞다. 어떤 노래의 제목처럼, 절뚝거려야 했다. 삶이 지탱되기 버거웠다. 개별적인 사건들보다 더 큰 총합의 힘듦을 견뎌야 했다. 슬픔은 복리였다. 나날이 불어났다. 희소한 기쁨으로 그 슬픔을 다 갚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늘 옳게 살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내렸어야 할 선택 아닌 다른 오답을 고르기도 했을 테다. 때론 삶의 항해가 많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 대단한 잘못들은 아니었다. 사소한 지탄의 대상도 될 수 없는 수준의 틀림이 변제되기 힘든 통증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에서야 느낀다. 그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 앞에 다만 내가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라는 결론은 허무하지만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다. 내 몫의 삶에 간절한 최선을 기울이지 않았던 건 맞았다. 그러나 20대 동안 느꼈던 슬픔과 서글픔은 전혀 합당하지 못하게 컸다. 그러니 절망을 나 스스로 야기했던 건 아니었다. 좌절이 있었고 내가 있었고, 그 시간을 겪어야 했을 뿐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면역이 부족했다. 그러나 삶에 필요한 소질을 미리부터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게 나를 기소할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나를 미워했다. 내가 아팠던 것에는 스스로를 보듬지 못하는 나 역시 서글픈 공범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다만 살면서 필요한 몇몇 기능들에 여전히 서툴 뿐이라는 속 편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픈 나를 책망하던 시간이 길었다. 나는 지금도 우산을 못 쓴다. 처음 우산을 쓴 게 아주 어릴 때였을 텐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비가 오면 우산을 써도 많이 젖는다. 거기에 글씨도 악필이다. 정리정돈에도 성실하지 못한다. 그렇게 잔소리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배운 것에도 서툰 나고, 해오던 것에도 모자란 나다. 겪어내지 못한 무언가에 유독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온전히 내 편이었다면 회복은 조금 더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아쉽긴 해도 나를 원망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는 걸 그때 몰랐다는 게 힐난의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생에 비가 내렸고, 우산도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내가 흠뻑 비를 맞았을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된 것 이상의 의미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침울해지는 순간은 존재한다. 그건 앞으로도 그럴 거다. 품고 살아야 하는 순간들이다. 그뿐이면 됐다. 최소한 그때처럼 열심히 앓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나아진 게 맞다. 나아진 것 역시, 그냥 이렇게 됐다. 물론 일어서기 위해 이런저런 방안들을 강구해보기도 했다. 대부분의 방법들은 무의미한 결과만 낳았다. 마땅히 이거다 싶은 무언가는 없었다. 똑 부러지게 나를 회복시킨 무언가가 없었음에도 나는 여기까지는 나아질 수 있었다. 굳센 의지도 꺾이지 않는 희망도 없었다. 간증할 게 없다. 그냥 이렇게 나아졌다. 어느 순간 그렇게 됐다. 아픔은 지겨웠지만 괴로움에 꽤나 매몰되었던 내가 그걸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진 않았었다. 죽을 만큼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걸리는 게 있기는 있는 세상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도 뭔가를 계속 느꼈을 것이다. 아마 경험의 축적과 나의 나아짐이 무관하진 않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잠식했던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건 아니었다. 그럴 힘도 없었다. 되려 무기력에 오래도록 천착했던 시간이었다. 노력은 숭고하지만 모든 결과가 노력 여부에 달려있는 건 아니다. 그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게 회복이었다. 진정한 노력조차 가끔 배신하는 게 인생이다. 다만 이처럼 아무런 최선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괜찮아지는 경우도 있다. 삶은 신기하다. 죽을 때까지 인생은 이렇다며 단언하고 정의 내리는 오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반례는 언제든 발견될 수 있으니까.


나는 꽤나 허무함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그렇게 돼서 아팠고, 그러다 이렇게 돼서 나아지게 된 시간이 남긴 결론이다. 삶은 복잡하다. 분명 어떤 역학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유의미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안 미약한 인과관계가 희미하게나마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아주 일부일 뿐이다. 여전히 왜 그렇게 됐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나는 내릴 수 없고, 그럴 일들이 앞으로도 아주 많을 테다.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원인을 탐색하고자 하는 건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지만, 그걸 명징히 파악하는 건 아주 어려운 숙제다. 나는 아마 다음 그 질문을 품게 됐을 때, 오래 고민하다 결국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할 것 같다. 겸손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겠어서다. 분명히 존재하는 게 맞긴 하지만 결코 알 수는 없을 해답이라면, 답이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이 모양이다.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인 일들의 상호작용이 한 생애일지도 모른다. 허무하기는 하다. 하지만 나를 애써가며 탓해댔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차라리 이 허무함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특별히 잘못하지 않아도 겪어야 하는 불행이 있다. 불행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쩌다 괜찮아질 수도 있다. 물론 더 깊은 절망도 가능하다. 어쨌든 무엇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단단한 명제를 구축하는 것에 그리 열심일 필요는 없다. 아무렇게나 되라며 생을 유기하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해내며 살다가 마주하게 되는 대부분의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너무 마음을 써대다가 그 마음이 다치게 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아팠음엔 큰 잘못이 없었고, 나아짐에도 기똥찬 비결이 없었다. 겪어야 할 아픔이었고, 마주하게 된 나아짐이었을 뿐이었다. 겪어낸 모든 것들은 무엇이든 남긴다. 지독했던 통증은 분명 나를 조금 더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삶이 잘 될 거라는 가정을 쉽게 전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건 분명하다. 아픈 불행이 삶의 도처에 더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숨어있는 불행을 마주하게 된 게 나를 비난할 건 아니라며, 얼마간은 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능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아플 순 있다. 그러나 능숙하지 못했음에 너무 깊이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이토록 어려운 생이 요구하는 모든 소질과 기능을 어떻게 채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릴 때부터 써오던 우산을 아직도 잘 못 쓰는 사람인데 말이다. 너무 나 편하자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마저 나를 편하게 하지 못하면, 내게 허락되는 건 위축과 자책뿐이다. 그 굴레에 나를 가두고 싶지는 않다. 물론 불행이 다시 찾아오면 아플 것이다. 깊이 절망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왜 빨리 나아지지 못하냐며 혹은 이럴 줄 진작 몰랐냐며 나를 책망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힘닿는 데까진 성실하겠지만, 힘닿지 않은 데까지 완전할 수 없다. 그렇게 나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는다면, 확언할 수는 없지만 불행에서 일어나는 게 지난 젊음의 아픔 때처럼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다. 다만 닥쳐온 일들에 따라 묵묵히 마음앓이하고 견디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할 수 있는 전부를 했으니, 더 내가 어찌할 건 없는 게 맞다.


솔직히, 생을 날로 먹고 싶다. 양심 없는 소리인 걸 알지만, 행복에 겨운 채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그런 생은 여지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다. 정도가 다를 뿐 인생에 불행은 필연이다. 다만 내가 내 몫을 하고는 있었다면, 그 불행이 전부 내 탓인 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할 일은 해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 외는, 어찌어찌 되고야 마는 생이 결정할 일이다. 조급해하지도 너무 후회하지도 않으며, 그 결정들이 그래도 조금은 나를 위하는 선택들에 가깝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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