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이끼리는 마음껏 서로에게 무너져도 된다

연인의 취업을 축하하며

by 사랑의 천문학

사람이 싫고 사람들이 드글거리는 세상도 너무 싫다는 말을, 참 많이 습관처럼 내뱉고는 했다. 사실이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내게 위안과 힘을 주기보다는 무언가를 소모해야 할 대상에 가까웠다. 인간관계는 감정노동의 다른 이름이었다. 사람 할 짓 아닌 건 다 사람이 한다는 어떤 시인의 문장을 굳이 인용할 필요까지도 없었다. 아무리 무해한 사람이라도 얼마간의 견딤을 요구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사람을 대한다기보다는 겪어내야 했다. 사회는 사람들의 집합체다. 본질적으로 피로감이 유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싫은 세상으로 돈은 벌기 위해 매일 집을 나선다. 돈벌이란 아주 단순하게는 생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돈이 있어야 먹고살고 가끔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삶을 유지하겠다는 이 짧은 목표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 우린 꽤나 많은 관문들을 넘어서야 한다.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유발하는 피로를 이겨내는 것도 그중 하나다. 급여명세서를 수령하기 위한 연봉계약서에 명시된 일을 하는 것 이상의 고충은 빈번하고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이 해내고 있다고 하여 그 절대적인 고통이 변제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밥벌이는 힘든 일이 맞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밥벌이는 없을 테다. 같은 보상이지만 조금 덜 힘든 곳 혹은 같이 힘들다면 더 많이 주는 곳을 찾기 위해 어릴 때부터 그토록 분주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취업 준비를 할 때, 나는 과장이 아니라 생존의 측면에서의 공포를 느꼈다. 과장이 아니다. 나이는 찼고, 실력은 없으며, 수치는 빈약했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라면 이런 준비생에게 속아 자신의 소중한 재화를 나눠줄 리 없을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꽤나 똑똑한 편이라는 게 문제다. 보기 좋게 여기저기 떨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열심히 살지도, 잘 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당연한 건 당연한 건데, 문제는 진짜 돈을 벌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낄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다. 지금의 일자리에 불만족스러울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새삼스런 세상의 평화를 느낄 정도다. 그러니 그때는 어디 하나 나를 써 줄 곳이 없을 것 같다는 서글픔을 늘 안고 살아야 했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지옥이 나오지만, '탈락 지옥'만 계속되는 인생만큼 씁쓸한 지옥을 없을 테다. 그 영화의 지옥들이 정신적으로까지 와닿지는 않았던 이유였다. 다행히 열심히 스스로를 포장하고 또 포장하여 지금의 회사에 들어왔고, 이제 벌써 몇 년 차가 되어 가끔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는 요령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취업 준비의 시간은 지옥으로 남아있다.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 내게 주어진 돈벌이의 책무를 다함에 있어서 당연히 피로하고 고단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준비를 해야 한다면, 나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며 살려달라고 외칠 것이다. 일자리를 갖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은 한 번으로 됐다.


이 힘든 걸, 나의 연인도 얼마 전까지 겪어야 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만한 다행히 없었다. 지옥 같은 밥벌이로 환영하는 따뜻한 축복이었다. 세상이 어떻든, 일단 붙고 보는 게 낫다. 그 사람도 최종적인 취업이 되기까지 그동안 꽤 먼 길을 돌아왔다. 돌아온 걸음들 속 한 발 자국씩의 가치를 생각하기는커녕 그저 늦음을 지각으로만 치부해 대는 세상에서 아마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심리적 압박이 컸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공범이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연인이 안정적이고 계산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최초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취업에 임하고 이를 준비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중요한 게 바뀌었다.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기를 그저 기도했다. 절망을 해봐서 절망의 통증을 잘 알고 있다. 취업에 있어서는 그 절망이 얼마나 목을 조여 오는 초조함인지도 슬프지만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지옥을 내 연인은 겪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 과정에서 연인과 다툼이 있기도, 연인을 채근하기도 했다. 내가 겪은 어려움을 상대 역시 따라 경험하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너그러이 지켜보기 어려웠다. 조바심을 겪을 당사자가 아님에도 그런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세상이 아니다. 혹여 세상이 연인의 노력을 배신했을 때 연인의 무너짐이 너무 깊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에서 했던 말이 행여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못나게 돌이켜 본다. 미안한 지점이다.


이제 연인도 나처럼 저녁에 피곤에 지쳐 잠들었다가 아침에 겨우 일어나, 어찌어찌 출근을 하여 하루를 견디는 생활을 하고 있다. 쉽지 않을 테다.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진 것 같아도 다시 정직원으로서의 일상과 업무는 무게감이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취업 준비 시간이 너무 숨 막혔어서 그렇지, 입사 초기도 떠올리기 좋은 기억은 아니다. 나의 자존감은 그때도 바닥을 쳤었다. 왜 고작 이거밖에 못해내는지에 대해 매일같이 깊은 자괴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연인에게 그런 순간이 없길 바라지만, 자괴감의 늪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해내고자 하는 목표와 해내줬으면 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스스로를 충분히 안아주는 건 꽤나 성숙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지나고 나서야 성숙해진 소리를 겨우 좀 입 밖에 꺼내볼 수 있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당시에 미숙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숙한 건 주어진 일에 서툴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법에도 소질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그걸 알아가는 게 자라는 것이지만, 알아갈 때까지의 과정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직장에서 연인이 견디어야 할 게 너무 벅차지는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혹여 자괴감이 찾아와도, 힘듦에 오래 머물러있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때 나는 나의 최선으로 격려와 위로를 하겠지만, 결국 중요한 건 본인이 어떻게 느끼는 지다. 위축될 때 더 빈번히 실수하고, 그게 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조금은 뻔뻔하고 당차게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위 누군가의 취업에 이렇게 애가 타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그래서 남들에게도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팔자는 그들의 팔자일 뿐에 가까웠다. 하지만 연인에게는 그렇게 초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나는 괜히 바보처럼 맘 졸이고 초조해했다. 앞으로도 잘 해낼 거라는 걸 믿는다. 이렇게 직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하기 힘든 세상에 멋진 일자리를 따낸 연인인데,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니 당당하고 씩씩하게 생활하기를 소망한다. 돈벌이가 때로는 신물 나는 염증덩어리로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를 보듬으며 잘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라 확신한다. 나는 아주 오랜 시절부터 꽤나 비관적인 사람이었기에, 나를 힘겨이 갉아먹으며 생을 견뎌야 했다. 연인이 나보다 명백히 나은 많은 지점들 중 하나는 밝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밝음 뒤에 더 짙은 그림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게 보여줬던 모습처럼 생을 대한다면 내가 저질렀던 미숙함을 따라 경험하진 않을 테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끔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역량 이상으로 지랄 맞을 때가 분명 존재한다. 그런 역량 밖의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엔 무너질 수밖에 없겠지만, 다시 일어서보려고 할 때 내가 지지대 정도는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끼리는 마음껏 서로에게 무너져도 된다. 나도 그럴 거고, 무너지는 연인을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


연인은 이렇게 삶의 한 걸음을 앞으로 더 내딛게 되었다. 돈벌이라는 속성 상, 고생스럽고 짜증 많은 걸음들일 것이다. 나는 염세적인 사람이라 사는 게 고생이다,라는 말을 종종 내뱉고는 한다. 돈벌이는 특히 더 고생스러운 '사는 일'이다. 보람과 보상이 하는 일에 비해 너무 적게 느껴질 수도 있고, 때론 업무적으로 깊은 실망과 자괴감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삶을 겪는 사람이 옆에 한 명 더 있다.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 둘이서, 그래도 만나 서로의 상사 흉을 보고 휴가도 맞춰보며 삶의 재미를 꾸려나갈 수도 있을 테다. 단정 지을 건 그리 많지 않다. 취업을 했다고 좋은 일만 있을 것도 아니고, 그러다 힘든 일이 와도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닐 것이다. 서로에게 맘껏 무너지며 나아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시간도 있다. 그 시간을 열렬히 믿어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금 더 어른이 된 연인에게 정말 고생했다는 말을 함께 건넨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지난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건 결코 아니다. 지나온 걸음에 경의를, 나아갈 걸음에 축복을 사랑을 담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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