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외롭게 두지는 않을 거야, 나를

나를 지키는 방안에 대한 공부

by 사랑의 천문학

버겁다는 말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매일 무엇인가를 감당하는 게 삶이라지만, 유독 겪어내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익숙한 불행이,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해진 불행이 내겐 그렇다. 지나간 일들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자는, 멋있어 보이는 영화 대사가 하나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으나 여전히 비문이라 생각한다. 지나간 일들이 아니라면 어디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할 수 있겠는가. 좋아질 리 없어 보이는 미래를 비관하는 흘리는 눈물이 더욱 처량하지 않겠는가. 눈물은 지나버린 일에 흘리는 게, 그래도 낫다. 그러나 대사의 본의에 집중하면 어쨌든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두고 그게 현재를 잡아먹게 두지는 말라는 따뜻함이 느껴지기는 하다. 지난 일들이 지나있지만 않아서 문제다. 꽤나 빈번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그때마다 다소간의 심장의 철렁임을 느낀다.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몰랐던 그 무게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내가 안고 살던, 그리고 묻으려고 했던 감정이 불쑥 튀어나올 때 아득함을 느낀다. 너무 잘 아는 슬픔이고 불행이다. 그래서 익숙하다. 하지만 불행이 익숙하다고 그것을 견뎌내는 데 능숙할 수 있지는 못하다. 나는 여전히 서툴게 불행을 맞이할 뿐이다. 또 나를 찾아온 그 감정에 무너지지 않으려 허둥지둥 애를 쓴다. 그 우스꽝스러운 부던함이 애처롭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무엇이든 오래 하다 보면 느는 게 아니다. 오래 나를 갉아먹었던 감정을 대함에 있어서도 나는 여전히 미숙하다. 하면 할수록 일도 어렵고 사랑도 그렇지만, 감정을 대면하는 것만큼 곤란한 게 또 없다. 앓은 만큼 잘해졌으면 내겐 다스릴 수 없는 감정이 없어야 마땅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러니 오래 할수록 는다는 말은 반만 정확하다. 아픈 걸 아파하는 데에는 더 잘 하지만, 극복과 회복에는 그저 더디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 나아진 건 내가 이런 나를 너무 미워하진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모자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했다기보다는 더 능숙한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체념에 가깝다. 그리고 이 단념이 나는 나쁘지 않다.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가 되고 멋진 걸 추구하도록 주입받으며 커왔다. 틀린 교육 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에 필요한 요구였다. 그러나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모두가 만점짜리 시험지를 제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든 나는 여기까지,라는 서글픈 진실에 고개 끄덕여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놓지 못하는 게, 어리석음으로 치부되는 시기도 있다. 미련이 있더라도 포기해야 하는, 소중한 '때'다. 나는 지금도 삶의 구석구석마다 요령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동경하지만 그걸 동력 삼아 삶을 꾸려나가지는 않는다. 나는 그럴 수 없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익숙한 불행에는 익숙하게 슬퍼할 뿐이다. 다만 주어진 만큼만 슬퍼하기 위한 노력은 기울이고는 한다.


감정에 앓는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된 게 삶을 그래도 조금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계기였다. 예전에는 나는 나를 타박해 댔다. 왜 빨리 우울로부터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지 답답해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무리한 요청이었다. 앓고 있는 사람에게 왜 멀쩡하지 못하는지를 묻는 무례를 내가 내게 범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사람은 멀쩡해야 하고, 멀쩡하지 못한 시기에는 어떻게든 멀쩡하려 발버둥 쳐야 하는 존재일 줄로만 알았다. 어렸고 어리석었다. 멀쩡한 게 나쁠 리 없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멀쩡하려고 애쓰는 게 되려 독이 될 수 있음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앓아야 할 땐 그저 앓기만 해야 함을 그땐 삶에 소질에 경험마저 없어서 더 몰랐다. 아프다는 건 나를 위로해야 할 시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만큼은 내 편이 되어 내 안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달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전송한 구조 신호를 힘껏 무시했다. 어릴 때는 무엇도 모르면서 그나마 아는 지식으로 단정 짓는 걸 참 좋아했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성숙함은 나를 포용하는 게 아니라 다그치는 것에 가까웠다. 그때 내가 나를 조금 더 안아줬더라면 나의 회복은 분명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옛날의 나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지나 봐야 아는 일들이 있다. 그 시절엔 죽어도 몰랐을 것들도 존재한다. 그때 죽어도 몰랐을 걸 왜 그럴 수밖에 없었냐고 몰아세우는 게 의미가 없다. 그때 내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며 묻어둘 일은 묻어둘 뿐이다.


몇 년 전 상담을 받으며 제일 많이 들은 얘기가, 나는 너무 내게 가혹하다는 말이었다. 나를 좀 아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꽤나 많이 청취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결국 이렇게 내가 느끼기 전에는 와닿지 않는 말들이었다. 지금 와서야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비치어졌는지 알 것 같다. 그때 나는 내게 많이 매정했다. 살아온 환경과 상황 그리고 가정이 어땠든지 간에, 나까지 내게 너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열렬히도 미워해댔다. 다소간의 후회는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땐 나를 아끼는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가끔은 뻔뻔하고, 남 탓도 해대고, 아프면 아픈 대로 축 무기력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견디는 방안을 알지 못했다. 알 수도 없었다. 마땅히 배운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배우지 못하고 타고나지도 못한 걸 왜 해내지 못했냐고 지난 내게 물어보는 건 무익하다. 다시 나만 열패감과 자괴감에 빠질 뿐이다. 다만 그렇게 나를 몰아세울 수밖에 없던 나와 화해하려고 한다. 아마도 나를 미워하고 꾸짖어대면서 스스로가 많이도 갉아 먹혔을 것이다. 감정으로부터 충분히 지나오지 않은 시점에 무리하게 회복을 하려다가 다시 무너져서 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때도 아픈 건 나였다. 지금 내가 해야 할 말은, '왜 그랬어'가 아니라 '많이 아팠지'라는 따스한 물음이다. 이제야 도착한 정확한 진심이 지난 시간의 얼어붙음을 다소간 녹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제는 새로운 불행이 찾아와도 너무 나를 몰아세우지 않으려고 한다. 분명 불행의 일정 부분은 나로 기인한 것이겠지만, 그 모든 게 나의 잘못만은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불행이 삶을 방문했는데 내가 왜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아파야만 하는지를 추궁하는 것보다, 우선 나를 회복하도록 스스로 돕는 게 당연한 먼저라는 확신이다. 당연한 먼저,라는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내가 나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앞으로도 쉽게 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슬픔이 찾아왔을 때 바로 탄력 있게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고 그럴 재능과 소질이 내게는 없다. 나는 침전되면 침전될 수밖에 없고, 할퀴어져야 하는 상처에는 내 마음을 내줘야 하는 무력한 존재다. 그러나 그런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능숙하지 못하다는 게, 또 무언가에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게, 나를 미워할 만큼 충분한 결격사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나를 보듬어야 하는 존재라는 당위만 명확해질 뿐이다. 슬픔 자체로도 버거운데 왜 이렇게까지 앓고 있냐는 매정함으로 나를 더 버겁게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아파할 땐 아파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게 아무리 익숙한 슬픔이고 불행이더라도 끝내 능숙해질 수 없는 내게는 필연적인 일이다. 자기애로 자존감이 제고되는 것까지는 못 이르러도, 나를 더 갉아먹진 않게 내가 나의 방어막이 되어줄 수는 있다. 늦게서야 깨달은 그 소중한 역할을 이제는 충실히 해내고자 한다.


나는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도 삶의 여러 측면에서 많이 미숙하다. 이를 겸허히 인정하되, 모자란 내가 아플 때 나 스스로가 외롭게 방치하지는 않겠다. 내가 충분히 나를 안아주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나서서 나를 찌를 필요 또한 더더욱 없다. 이 소박한 작은 노력이 큰 힘이 되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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