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듣고, 또 듣기
12년쯤 전에 혼자 떠났던 첫 해외여행의 마지막 날쯤에, 넬의 '청춘연가'라는 곡이 발매되었다. 가사 중에 '시간은 날 어른이 되게 했지만 그만큼 더 바보로 만든 것 같아'라는 부분이 있다. 시간이 흘러 곱씹고 곱씹을수록 의미를 알게 되는 구절 중 하나다. 시간이 그로부터 어찌어찌 흘러, 내가 어른은 되었다. 자기 돈벌이를 하며 삶을 영위하는 게 어른이라면, 나는 어른이 맞다. 어릴 때도 어른에 대한 기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피터팬 콤플렉스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 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 삶이 특별하지 않다고 볼품없다고까지 느끼지는 않는다. 멋있는 걸 해내지 않는다고 하여 무의미한 건 아니니까. 주어진 일을 하고, 내게 필요로 하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가사처럼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단순히 어릴 때는 기가 막히게 풀어대던 수능 문제조차 이제는 버거워서 드는 생각은 아니다. 삶에 대해 도통 잘 모르겠다. 쉽다고 생각했던 것들에도 가장 기초적인 풀이조차 떠오르기 힘들 때도 많다. 내가 알아야 하고 알게 된 숫자들은 늘어났지만 그게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나를 지키는 것 같지는 않다. 나이는 어른인데, 너무 모르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 나를 잘 보듬고, 다스리고, 때로는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좋음'에 대해 가끔 생각하고는 한다. 좋은 글은 무엇이고 혹은 좋은 태도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다. 좋음은 '선함'과 완벽한 동의어는 아니고, 그러면서도 일정 부분 본이 될 만한 구석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읽었을 때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이고, 좋은 태도는 쓰러짐을 무너짐으로까지 방치하지는 않는 태도다. 그렇다면 좋은 어른은 무엇일까. 여전히 부족한 식견으로, 좋은 어른은 '듣는 어른'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는 순간, 우린 더 바보가 되고 괜찮음과도 멀어진다. 그러나 듣는 일이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진다. 대학 초반이나 사회 초년생 때는 오직 들어야만 했다. 그땐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듣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름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며, 타인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경험이 많이 적어졌음을 느낀다. 어느 순간부터 완고해졌고, 이게 나를 바보로 만드는 데 한몫하는 중이다. 서툴게 듣고 내려버리는 판단이, 때로는 상대를 오독하고 또 때로는 설익은 위로만 건네게 한다. 멋진 말을 건네는 건 오히려 쉽다. 진심 어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어렵다. 어렵기에, '듣는 어른'은 그나마 좋은 어른이다.
세상엔 말이 많다. 말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쏟아진다. 그래서 우린 꽤나 많은 말들을 듣고 있다는 착각을 겪고는 한다. 하지만 스쳐 지나는 말들이 모두 들리는 말은 아니다. 우린 단순히 청각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라, 말에 집중하며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들음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게을러지지 않으려는 주의가 요구된다. 여기서 제일 큰 적은 이미 많은 말들을 듣고 있다는 오만과 교만이다. 우린 데시벨을 겪는 것이지 말에 집중하는 게 아니다. 물론 어렵다. 얼치기 같은 알량한 지식이 자꾸 상대의 말을 들을 필요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집중하여 듣는 것에 게을러지는 순간, 우린 덜 좋은 어른이 될 확률이 높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만져볼 수 있는 건 타인의 삶을 통해서인데, 말에 집중하지 않게 되며 자연히 우리가 견지한 세계도 좁아지기 때문이다. 세계의 너비를 규정짓는 순간 우린 더 확장되지 않는 세상만을 안고 살아야 한다. 깊이가 있는 것과 더 큰 세상을 부정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후자는 사람을 고여있게 만든다.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며 성장하는 게 어려워진다. 물리적인 나이의 어른이 된다고 가르치는 역할만 부여받는 게 아니다. 우린 언제나 배우고 또 배워야 가까스로 초라함을 면할 수 있다. 그러니 '들음'은 좋은 혹은 나쁘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한 첫 단계다.
'시간은 날 어른이 되게 했지만, 그만큼 더 바보로 만든 것 같아'라는 말 역시, 시간이 흘러 나이는 물리적인 어른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아진 상황을 얘기한 가사였을 것이다. 무지는 더욱 촘촘한 스펙트럼으로 우리를 방문하고는 한다. 우리가 알게 되는 건, 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는지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절대 충분하지 않다는 겸허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얼마 되지 않는 한 줌의 지식과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이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사고와 세상의 폭을 넓히는 건 어려운 연습이다. 하지만 마음이 '닫히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세상이 참 빠르게 바뀐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게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세상에 너무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연습을 계속해야 되는 건, 결국 그것이 덜 바보 같은 어른이 되는 우직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민과 생각, 경험을 들으며 우린 우리가 겪지 못한 것들을 상상하고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를 성숙하게 할 재료들이 더 많아지고, 그 속에서 고민하고 나름대로 정리를 하며 우리의 의견은 한 층 더 힘을 얻는다. 더 정확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선결 조건은 결국 '들음'이다.
분명 타인의 모든 말이 가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기존의 생각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청을 하지 않는다면 이미 옳은 우리의 의견은 강화될 기회를, 틀린 의견은 반박으로 수정될 기회를 모두 놓치게 된다. 나 아닌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듣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어른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만큼 쉬운 방안도 없다. 단순하다. 타인의 이야기를 섣불리 단정 짓지 않고, 말을 끊어내지 않으며, 저 사람이 어떤 걸 느꼈고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짚는 연습을 계속하면 된다. 그건 타인이라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 방법이자 우리가 정체되지 않도록 돕는 방안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많이 말하는 사람은 넘치는데, 잘 듣는 어른은 귀하다. 말은 결국 자신의 깊이의 투영인데, 소모만 존재하는 말은 시간이 지나도 깊이가 깊어질 리가 없다. 잘 듣는 사람일수록 할 수 있는 말도 더 의미 있고 깊어질 수 있다. 당연한 구조다. 나날이 폭이 넓어지는 이의 말이 더 사려 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작은 습관의 차이가 언젠가 사람의 깊이에서 유의미하고 가시적인 격차를 만들 거라 믿고, 그때 잘 듣는 사람은 '좋은 어른'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그때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린 바보 같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더불어 스스로에게 채워나갈 구석이 있음도 인지할 수 있다. 경청은 그 첫 번 째 열쇠다.
모자람을 알고 그 모자람을 충족할 방안에 대해 무지하지 않기에, 우린 다행히 잘 들으면서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