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멜로가 체질>
하루를 마치며 맥주 한 잔의 행복을 느끼는 하루키를 동경하다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버려 하루키의 생활에 이르지 못했다는 주인공의 사랑스러운 고백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 속 주인공 진주는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덧붙이며 자신이 써 온 대본 원고를 내민다.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걸 포기한 대본이라고. 앞으로 어떤 재밌는 드라마를 봐도 나는 <멜로가 체질>과 비교할 것이다. 늘 그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내 드라마 시청사에서 대체될 수 없는 드라마다. 대사들이 곱씹고 곱씹어도 사랑스럽다. 그 사랑스러운 재치에 한참을 웃다가 보면, 너도 그렇지라며 위로받는 느낌이다. <멜로가 체질>에는 특별한 악인이 나오지는 않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우리 스스로는 복잡하게 착하고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요지의 문장을 쓴 적 있었다. 이를 차용하면, <멜로가 체질>이 그리는 세상은 '대체로 복잡하게 하찮은' 존재로서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우리는 한없이 찌질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못나게 질투도 하며, 사랑 때문에 무너지기도 하고, 때론 너무 미워하는 누군가를 골탕도 먹이려고 이 악무는 사람들이다. 영웅적으로 선하지도 않지만 단죄될 정도로 악하지도 않다. 다만 생의 어떤 측면에서 우린 그저 참을 수 없이 하찮을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 범수는 얘기한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이 조금 더 손해를 보면서 살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하찮고 모자라지만 나쁘진 않은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살만하게 꾸려나간다.
<멜로가 체질>이 사랑스러운 건, 모두에게 감정을 이입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들이 순간마다 느끼는 감정들과는 접점을 만들 수 있다. 나쁘지 않은 주인공들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우리 역시도 그들처럼 평범하고 어떨 때는 하찮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나는 그 '하찮음'을 진심으로 애정한다. 대단한 건 멋지다. 대단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대대손손 남기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위인'이라는 칭호도 붙는다. 물론 그것도 선하거나 영웅적인 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길이길이 악인으로 남는 것도 말은 되니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이러나저러나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건 극소수의 이야기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는 한다. 그것도 이름난 위인의 이야기다. 결국 우리 대부분은 위인 근처에도 못 갈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인류 역사의 아주 많은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패했던 일들을 우리가 해내지 못했다고 삶을 성실히 산 게 아닌 걸까? 아니다. 우린 우리대로 열심히 살아간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끔 투정과 불평도 하면서 생은 이어진다. 그러면서 가끔은 나쁘고 발칙한 생각도 품어본다. 욕을 할 때도 있고,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떄서. 우린 그렇게 하찮은 구석들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데,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다시 맥주 한 잔의 행복을 느끼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역시 모자란 우리니 다시 과음을 하고 속도 뒤집혀 가며 꾸역꾸역 살아갈 때도 있는 게 우리 생이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걸 포기해 버린 진주의 대본은 많은 걸 시사한다. 성실히 살되, 어떻게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서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벗어난 철학이 담긴 말이다. 나 같은 직장인들은 프로다. 프로란 무엇인가. 남의 돈을 받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진주도 프로고, 범수도 프로고, 드라마에서 자신의 일에 종사하는 주인공들과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프로다. 진정한 프로의 가장 큰 미덕이란, 남의 돈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일거리에 투덜투덜하는 것이다. 하지만 숭고한 건, 그러면서도 자신의 할 일을 해낸다는 점이다. 일을 꼭 숙명처럼 해낼 필요는 없다. 소명의식이 있으면 좋지만 제 값은 하겠다는 직업윤리의 책임감도 그에 못지않게 멋지다.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는 건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게 첫 번 째 복이고 그 일을 밥벌이로 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복이다. 대부분의 박복한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해내는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돌아간다. 그게 비록 우뚝 솟은 직업적 성취 욕구 때문이 아니더라도, 때론 초라하고 때로는 못난 모습으로 우린 할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멜로가 체질> 속 진주와 주인공들이 자신의 일을 대할 때 유독 공감이 갔던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해낸다는 것. 해야 할 일을 해낸다는 건 살아가야 할 삶에도 마땅히 필요한 성실한 자세로 임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각각의 주인공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리 만만치 않은 사연 한 두 개 씩 다 있었다. 마치 하기 싫은 일을 투정을 부리면서도 다 해내듯, 삶을 힘들게 하는 사연들에도 주인공들은 삶의 동력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결국 살아가는 중에, 유독 벅찬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진주의 친구 은정의 경우 먼저 사별한 전 연인과의 기억이 그녀를 오래 버겁게 했다. 우리는 슈퍼맨이나 그에 준하는 영웅이 아니다. 슈퍼맨이든 배트맨이든 소위 말하는 히어로들도 나름의 상처들이 다 있다. 그건 마법사와 인류를 구해버린 해리포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겪는 트라우마와 통증을, 평범한 우리가 무사하게만 지나칠 일 없다. 우린 얼마간은 하찮고 초라한 존재들이니까, 당연히 아픔을 겪고 삶의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시사점이 있다. 우리는 굳이 혼자서만 하찮고 초라하고 외로워야 할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모자란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과 위로가 되어줄 수 있고, 서로가 서로를 버팀목 삼아 다시 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 자신 스스로의 삶을 충분히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다면 최선이다. 하지만 생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아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고 스스로마저 미워지고 싫어지며 불신하게 될 때, 그래도 나를 지켜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힘이다. <멜로가 체질>에서 은정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토로했을 때, 친구들과 그녀의 동생이 했던 건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적인 조언들이 아니라 옆에 있어주는 것이었다. 시답잖은 행위들과 말로 은정을 당황시키기도 하며, 그들은 어쨌든 은정이 혼자가 아님을 계속 상기시켰다. 우리 모두 은정만큼은 아니더라도 은정처럼 가슴 아린 사연 몇 개는 품고 살아간다. 그때 스스로가 초라해 보여도 외롭지만은 않는 건, 우리가 무너지지만은 않기를 바라는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염려 덕분일지도 모른다. 우린 알게 모르게 주변에 빚을 지며 살아가고 다시 그 빚을 타인에게 곁을 내어줌으로써 갚는다.
그래서 드라마의 제목인 <멜로가 체질>로 귀결된다. 드라마 도입부에 진주는 '사랑 타령' 하는 게 좋다고 했다. 드라마 안에는 진주와 범수의 사랑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시점의 사랑이 등장한다. 지난 사랑, 어린 사랑, 성숙한 사랑, 미숙한 사랑, 그리고 가끔은, 똘기 있는 사랑까지. 사랑, 사랑, 사랑. 생각해보면 사랑이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다. 적당한 프로 같은 면모를 뽐내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에 지장은 전혀 없다. 거기다, 조금 외롭거나 지칠 때는 주변의 지지와 응원으로 우린 다시 버틸 힘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삶의 사족일까. 당연히, 아니다. 사랑이 있어서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값어치 있어지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우린 많이 앓는다. 사랑이 속을 썩여 마음을 붙잡기도 하고, 사랑이 미워질 때는 세상을 원망하며, 사랑이 떠날 땐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린 다시 사랑을 한다. 사랑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세상에 사랑을 예찬하거나 이에 대해 예쁜 말을 쓰면 '오글거린다'라는 딱지가 붙고는 한다. 부당하다. 사랑은 예쁘고 그러니 예쁜 말을 하는 것인데, 거기에 감정 과잉이라고 하면 우린 적확한 표현의 발화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 된다. 가족이든, 친구든 또 연인이든. 사랑은 우리를 더욱 살만하게 만든다. 사랑이 없어도 의식주에 지장은 없다. 사랑이 있기에 의식주를 나누고, 그 뜻은 삶을 나누며 함께 생일 견딜 수 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는지, 그 공식의 정합성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생의 아름다움은 분명 존재한다. 없어도 된다고 하기에는, 너무 예쁜 아름다움이다.
대체로 우리는 복잡하게 하찮고 모자란 존재들이다. 혼자서 세상을 견디기에 우린 오래도록 철이 없고 능숙하지 못하며 소질이 모자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세상을 꼭 매 순간 혼자서만 여행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떨 땐 추한 모습일지라도 옆 사람의 어깨에 과하게 기대어도 보고, 어쩔 땐 그 사람의 무너짐을 감당하기도 하면서 삶을 버티고 겪어나갈 수 있다. 한의원에 가면 우리가 무슨 체질인지를 알려준다. 거기에 적합한 처방을 통해서 우리가 건강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한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너무 뻔한 답 같지만, 굳이 자기주장 강한 정답을 외면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삶은 높은 확률로 가장 멋진 경지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평범하고, 때로는 평범이라는 말로도 모자를 정도로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럼 좀 어떤가. 굳이 사람이 이름을 남겨야 하는가. 한 생애를 주위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충분히 따뜻하게 살 수 있다면, 그건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가치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세상의 재앙을 구해내지는 못해도 삶에 재난이 찾아왔을 때 함께 그 시간을 견딜 사람들이 있고, 그러면서 마음을 주고 곁을 내줄 존재들이 주변에 있다면 그건 '경지에 이를 정도로' 성공한 인생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실패하지 않은 삶 아니겠는가. 아니다, 너무 야박하다. 그것 역시 이미 성공한 삶이 맞다. 매일의 루틴을 마치고 맥주 한 잔의 행복을 아는 하루키의 삶도 의미 있다. 하지만 때론 맘에 맞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과하게 마시며 흐트러지게 웃음을 짓는 것도, 분명히 가치 있는 행복이고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