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세상은 언젠가 지랄이거나 지옥이었고, 때론 지랄 맞은 지옥이었다. 지옥에도 층위가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살아내는 세상이 살만한 지옥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이쯤이면 이제 지옥은 아닌 게 아닐까 싶은 때도 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싶다. 지난 시간 동안 성실히도 불행했었다. 불행이 깊을 땐, 별 수가 없었다. 그냥 불행해야 할 뿐이었다. 삶의 아픈 점은, 모난 진실의 뾰족함을 괴롭게 껴안았을 때 비로소 편해지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불행할 땐 불행해야 할 뿐이라는 것에 적응하기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불행이라는 게 내가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친다고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모한 노력이 나를 절망으로 이끌기도 했다. 야속하지만, 시간을 믿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어느 정도 옅어져 있을 거라는 막연함에 기대야 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뭘 그리 잘못했지, 나는 어디서부터 망가진 거지, 따위의 생각은 지금도 끝없이 든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이끄는 손짓에 그리 쉽게 따라가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조금 불편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원래대로 들었던 생각대로가 아니라, 비록 긍정은 안 돼도 그 순간에 모든 걸 판단하고 결정하지는 않겠다고. 답답함을 못 참는 성격이지만, 최소한 불행을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시간을 활용하고 결정을 유보하는 우유부단함을 지녀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중대한 결정을 우울한 상황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건, 오판의 가능성 때문이다. 감정에 매몰된 상태에서의 논리적 흐름은 기본적으로 재단된 삶의 반대편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어질 뿐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나를 또 누군가를 설득한다고 해도 절반의 진실 위에서만 내려진 결론이 충분히 논리적이기는 어렵다. 스스로와 혹은 타인과 토론할 때 중요한 건 내 생각과 배치되는 이의 의견도 '경청'하는 것이다. 우울한 상태에서의 생각은 보통 삶의 다른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배제한 채 귀를 막고 내뱉는 독백과도 같다. 어쩔 수 없기는 하다. 그게, 우울이고 절망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참담한데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게 믿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울이 또 불행이 무서운 것이다. 나는 혼자서 깊이 파고들면서 나를 또 누군가를 원망하고 세상을 멀리하게 되는 내 절망의 구석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을 근거와 동력 삼아 내려진 결정도 미안하지만 존중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그런 결정이 내려질 수 있음은 이해하되, 그 결정까지 인용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겁하지만 '유보'다. 당장의 지옥을 견디기 힘들어 내려버린 결정이 오판인지를, 이후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다시 살피겠다는 의미다. 견디지 못할 것 같던 지랄 맞은 지옥은 이후 살만한 지옥이 될 수도 있고, 그저 지랄일 수도, 때로 지옥 아닌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정할만한 선택이 아니라면, 존중되지 않아야 한다.
별 짓 안 하고 그냥 나를 방치하는 게, 역설적이게도 나를 혼신의 힘으로 지키는 방법인 셈이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삶은 나아지고 있다. '대체적으로'라는 말의 힘을 믿는다. 순간순간의 괴로움과 고민이 있더라도, 어쨌든 한 방향의 선형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그 단순함이 퍽 좋다. 그러니 너무 우울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펼쳐낸 논리가, 실은 힘이 없는 메아리일 수도 있다. 주로 그 논리는 앞으로 더 나아지거나 편해질 게 없다는 좌절과 단념을 전제하는데, 삶이 나아질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미 무의미한 조건이다. 습관대로 사는 게 편하고, 하던 대로 생각하는 게 또 가장 안락하다. 불행과 슬픔이 남긴 못된 버릇과 습관을 너무 믿지는 않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 불편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빠르게 그들이 추동하는 결론에 끄덕거리지 않고, 게으른 결재권자처럼 밍기적거리다가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보려고도 한다. 삶은 나아졌다. 삶은 나아지고 있다.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는 삶이라면, 앞으로도 나아질 수 있을 테다. 힘들었고 힘드니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라는 논리를 가장 단순히 방어할 수 있는 경험적 진실이다. 세상은 물론 어렵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어렵지만, 유독 소질 없고 능숙하지 못해 어려움을 크게 겪는 나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내게 모든 희망이 기약 없고 아득해 보일 때 나는 세계는 결코 내게 다정하거나 친절할 수 없을 거라 단정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아는 졌잖아'라는 경험이 그 서글픈 속단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그 시간을 기꺼이 벌어줄 테다.
추운 세상이라 그런지 온도와 관련된 생각들을 하게 된다. 한때 세계가 북반구 최북단 어딘가의 마을처럼 춥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이 마냥 따스하다고 여기지는 않으며, 그런 세상이 있을 거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세상이 '그런대로'일 수는 있다. 그런대로 덥고, 그런대로 춥고, 그래서 너무 진을 빼거나 살이 아리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살아낼 수는 있다. 그걸 우리는 '살만하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기는 어렵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수는 있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마다에 주어진 삶을 각자의 최선으로 가꾸고 채워 넣으며 하루씩 살아간다. 우울과 절망은 그 모든 과정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진실은,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우울과 절망이 포기하라고, 멈추라고, 더 이상 좋아질 건 없다고 이야기하고 그게 너무 맞는 소리 같아 자연스레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가 유일한 구원처럼 들릴 때도 분명 있을 테다.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아득바득 반박을 해봤자 나는 더 위험한 절망을 마주할 뿐이다. 다만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겸허히 인정하려고 한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도 무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급하게 내려버린 결론에는, 언제나 '성급하다'라는 걸 인지하는 연습도 잊지 않을 것이다. 절반의 진실 위에 잉태된 논리는 정교할 순 있지만 편협할 뿐이다.
언제든 다시 지금보다 불행해질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때 찾아온 불행이 우울을 동반하여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뒤 오직 제한된 논리만을 전개할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 말이 너무 그럴듯하여 나는 어쩌면 동의해버리고 싶은 욕구를 여러 번 느낄 테다. 삶이 지랄이고 지옥이면, 우린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건 자연스럽다. 그동안 나를 지키던 나약한 삶의 병졸들을 모두 이겨버리고 덜컥 찾아온 불행인데, 이를 무슨 수로 거부하거나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 폭압적인 불청객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에는 동의해야 한다. 이 불청객은 심지어 여기저기를 헤집을 수도 있다. 그러나 쌓아온 집을 무너뜨리는 것까지 마냥 지켜만 볼 수는 없다. 내게 있어 그때 울리는 경고 메시지가, '지난 시간을 잊지 마'라는 구절이다. 지난 시간을 잊지 않아서 나는 불행이 예고 없이 언제든 나를 방문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역시 지난 시간을 잊지 않아서 그 불행과 우울이 다시 못된 괴롭힘을 멈출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처럼 변하겠지만, 다시 나는 묵묵히 내 삶을 쌓아 올리며 하루씩을 소비할 것이다. 그런 지리멸렬한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게 삶의 본질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그 소모적인 투쟁에서 지지는 않으려고 하고, 그렇다면 불행과 우울의 존재까지는 긍정해도 그들을 존중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 숭고하지도 혹은 없이 못 살지도 않는 이 감정들에, 많은 걸 잃고 빼앗기겠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지켜야 할 건 지켜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게는 그 방안이, 그들의 이야기에 바로 당장 고개 끄덕이지는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