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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11. 2023

자우림, '샤이닝'

너는 고작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유지했던 인스타그램을 정리했다. 계정은 비활성화됐다. 뭐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면 대단한 인플루언서였는줄 알겠지만, 팔로우 수는 애초에 얼마 되지 않았다. 내 비루한 현실에 비해 인스타그램 상에서 너무나도 잘 지내는 사람들이 꼴 보기 싫어서 그랬던 건 절대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고, 많은 사람들이 웃고 잘 지낸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다. 다만 내가 올리는 게시물들이 우울 이외에 다른 게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공해를 일으키고 있는 듯한 자괴감도 들었다. 실제로 최근의 게시물들을 보면, 다 우울에서 비롯된 것들이거나 가끔 술과 관련된 포스팅들이 전부였다. 잘 모르는 어떤 이가 나를 술만 마셔대는 한심한 우울쟁이라고 판단해도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요즘 무슨 일 있냐는 걱정 어린 연락을 받기도 했다. 무슨 일은 항상 있지, 라는 뻔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누군가의 염려를 받는다는 건 그게 빈말이 됐든 아니든 벅차도록 고마운 일이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없어도 멀쩡히 잘 돌아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우울과 잘 지내지 못함에 개의치 않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습게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도 괜한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기분에 바로 계정을 비활성화했다.


    인스타그램 하나를 그만뒀다고 내 삶에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획기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똑같은 세상이었다. 오히려 무언가에 대한 소식을 접함에 있어 조금은 뒤처지기 시작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어차피 유행을 창조할 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창조된 유행을 충실히 따라갈 팔자도 아니니 그럼 좀 어떤가 싶었다. 습관처럼 들어가던 인스타그램이 이젠 없다는 건 처음에는 조금 익숙해지기 힘들기도 했다. 일종의 금단현상이었달까. 다행히 그리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인스타그램 없는 삶에 그래도 나름대로 금방 적응이 되었다. 어쨌든 더 이상은 스스로의 우울과 잘 지내지 못함을 굳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세상에 떠들어대지 않는다. 그동안 우울을 티 냈던 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좀 알아달라는 소리였을까. 남이 내 우울을 아는 게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닌데. 내 우울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면 오히려 그건 정말 끔찍하다.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고 인스타그램에 우울과 관련된 게시물들을 그리도 올렸던 걸까. 털어놓고 나면 후련할 것 같은 기대가 나도 모르게 있었나. 아무튼 그러기에는 나의 우울과 인스타그램과 성격이 안 맞았다.


    세상은 원래 인스타그램보다는 어두운 곳이라는 소리가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렇다고 꼭 SNS가 삶의 구체적 반영일 필요는 없다. 어쨌든 인스타그램은 나의 우울과 절망을 드러내기에 썩 적합한 플랫폼은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우울 이외에 올릴 게시물들이 전혀 생각이 안 났다는 점이다. 그만큼 요즘 참 사는 게 어렵다. 아주 긴 어두운 동굴에 있는 기분이다. 터널에는 그 길이가 어떻든 시작과 끝이 있으니, 동굴이라고 하는 게 보다 더 적확할 것이다. 이 동굴에 끝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루하루 기약 없이 걸어갈 뿐이다. 기약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든 지점이다. 희망이 없다는 말과 등가의 문장이기도 하다. 걸어가던 관성이 아직은 소진되지 않고 남아있기에 걷는 것뿐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영영 다시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애써 걷는 중이다. 걸음을 방해하는 현실적인 이유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개별적 고통들의 총합보다 지금 느끼는 우울이 더 크게 와 닿는다. 그러니 현실에서만 우울의 모든 이유를 찾을 순 없다. 어떤 시급한 조치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그냥 동굴 속을 의미 없이 걸을 뿐이다. 빛 따위란 없는 이곳을.


    물론 배부른 소리겠지만, 차라리 현실적인 이유들이 명확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 지금 이렇게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하자들이 있으니 자연스레 우울하다는 단순한 인과관계가 쉽게 도출되었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의 우울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복합적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어쨌든 이건 분명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울의 영역을 의지와 마음가짐의 판단기준으로 재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너는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그냥', 이라고 대답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니면 그냥 대충의 이유를 둘러대기도 한다. 그럼 '에이 뭐야' 혹은 '고작 그런 이유로?'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서글프지만 존재한다. 그게 얼마나 폭력적인 반응인지는 전혀 자각이나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 우울의 자격을 박탈하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방어기제가 별로 없다. 오히려 스스로를 해칠 뿐이다. 정말 그런가.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이리 힘든 걸까. 나만 유난을 떨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나 혼자만 뭐가 그리 예민하다고 이렇게 멈춰있을까. 아픈 질문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관통한다. 결국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만 한 번 더 숙이게 된다.


    최근에 슬픔의 감정을 많이 느끼고 있다. 눈물도 조금 주책맞게 많아졌다. 아주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깨어 있는 시간이 다소 괴롭다. 그냥 참 별 일 아닌 일들도 슬프게 느껴진다. 요즘 비가 참 많이 내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우산을 아주 못쓰던 아이였다. 사람이 우산을 못쓸 수도 있나 싶겠지만 정말 그랬다. 같은 길을 걸어도 더 젖고 마는 건 언제나 나였다. 지금이라고 우산을 잘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나이 먹도록 이렇다. 내리는 비에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젖지 않으려 애를 써도 조금은 젖게 된다. 그러니 비가 오면 젖을 수밖에 없다. 내리는 비를 삶에서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비유하고는 한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도 나는 그리 우산을 잘 쓰는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비에 쉽게 젖었고, 그로 인한 감기가 내가 지금 겪는 우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어떡하겠나 싶다. 인생에 비만 내리지는 않을 테니. 아무리 우기라도 가끔은 맑은 하늘도 있으니. 그때 조금 나의 젖은 옷을 말릴 수 있다면,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어쨌든 스스로를 '고작 그런 이유로'라는 구절로 지독히 괴롭히는 건 지양하는 게 맞는 듯하다. 사람이 아파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냥 내리는 비에, 재수도 없이 많이 젖었다고 생각해야겠지.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상기했듯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고 한다. 그곳은 나의 아픔과 우울도 머물 장소가 못 되었다. 자우림의 노래 '샤이닝'이 문득 생각났다. 노래의 가사처럼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무언가가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누군가가 있을까. 무엇도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많이 외롭고 초조하다. 마음이 다시 조금 아프다. 인스타그램을 지운 건 아무래도 잘한 결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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