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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10. 2023

백아, '테두리'

사랑을 앓아서 사랑임을 알아요

    사랑을 정의 내리려는 시도는 지금껏 무수히 많았다. 모든 것이 정답이었고 다시 모든 것이 오답이기도 했다. 우린 '인생이라는 무대'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우리의 연극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혼자서 이끌어가야 한다. 이 외로운 원칙에 예외가 있다면 바로 사랑을 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여태껏 아주 많이 축적된 사랑에 대한 정의들에 다시 감히 오답 하나를 보태자면, 우리의 인생이란 연극에 나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가진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일이 바로 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게 중요한 의미라는 것이, 나 역시도 그 사람에게 등가의 의미로 자리하리라는 보장은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는 일은 기적이고, 안타깝게도 모든 기적이 그러하듯 이런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 안타까운 혼자만의 사랑을, 세상은 '짝사랑'이라 부른다. 내 마음 안에서 너무 커져버린 상대방. 어느덧 나만큼이나 중요한 배역을 차지하게 된 당신. 아니 어쩌면, '내'가 당신의 '테두리'를 맴도는 달이 될 정도로 '나'보다도 더 소중해져버린 사람. 하지만 끝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수는 없는 우리다. 그런 '나'는 오늘도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아리게 그리며 밤을 보낸다.


    '내 오늘도 그댈 담을 말이 없'다고, 백아의 노래 '테두리'는 안쓰럽게 시작된다. 그대의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걸, 노래 속 '나'는 슬프지만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가끔은 생각해보기도 한다. 끝내 사랑일 수 없는 우리이기에, 혹시라도 '그대' 없는 세상이었다면 이런 짝사랑의 아픔도 느끼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대' 없는 세상을 잠깐 상상해본다. 아니다. 그건 정말 안 된다. '그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건 그저 무채색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럴 바에는, 그냥 지금처럼, 우리가 사랑이 아닌 게, 많이 아프지만 그래도 낫다. 우리가 사랑으로 이어질 수는 없겠지만, 어느덧 '내' 삶은, '그대'가 있음으로써 빛나는 연극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슬프고 또 조금은 원망스럽다. 왜 애써 사랑한다는 말을 감춰야 하고, 마음 안에서 자꾸 자라나는 '그대'를 눌러야 하며, 그러니까 왜 이 자연스러운 '마음'마저도 애써 삼키려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가사처럼, '깊어진 마음만 초라해지는' 밤이다. 초라하게 깊어진 마음을 갖고 잠을 청하려 하지만, 잠도 쉽게 오지 않는 밤일 것이다. 왜 나는 '그대'의 사랑이 될 수 없는 걸까. 왜 우리는, 서로의 사랑일 수는 없는 걸까. 왜 우리는 기적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듯, '나'는 내일도 '그대'의 주위를 마치 달처럼 공전할 것이다. '축시'라는 류근 시인의 시가 있다. 서로의 안녕과 축복을 빌며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시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고 시는 끝을 맺는다. 분명 아릿하면서도 아픈 시다. 저밋한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때는, 이 시의 두 사람은 '사랑'으로 이름 지어진 적이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두 사람에게는, '지난날 함께 나눈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이라며 추억할 무언가가 있다. '테두리'의 '나'에게는 그럴 추억조차 없다. 그냥 매일 소모되는 혼자만의 마음만이 있을 뿐. 짝사랑을 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나의 일상이 그 사람의 삶을 공전한다는 것이 비유나 비약이 아니다. 짝사랑을 통해 마음을 아무리 소모한다고 하여, 그 사랑이 없어지고 비워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게 또 하나의 문제다. 오히려 그 초라한 마음에 다시 초라한 사랑 하나가 보태질 뿐이다. 소모하면 소모할수록 더욱 깊어만지는 마음이 바로 짝사랑이다. '테두리'의 가사에는 '내 맘은 무뎌지지 않으니, 익숙해지지만 말아주시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깊어질수록 슬피 운 것도 아닌 부슬비처럼 나 살아갈' 것이라고. 곱씹을수록 아린 표현이다.


    '테두리'는, 가사에 따르면 '늦은 밤 꺼내서 미안'한 사랑 노래다. 당신은 아마 나의 이런 마음을 전혀 모른 채 지금 잠을 자고 있을 테다. 늦은 밤 당신을 그리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다. 짝사랑은 참 너무 아픈 불공평이다. 그런 '내' 마음이 참 많이 초라하다. '내' 인생이라는 연극에 불쑥 나타난 당신이라는 사람. 지나가는 행인인 줄 알았으나 나보다 더 중요한 배역을 가지게 된 당신. 난 아마 주위를 서성이며 그저 당신을 바라보겠죠. 이 '어리숙한 마음'이 '정리'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요? 모르겠네요. 나는 아마 당분간은 이렇게 잠을 설칠 것 같아요. 그대는 반드시 잘 자요.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기를 바라요. 그러다 만약 어쩌다 꿈을 꾸게 된다면, 그 꿈에서라도 나를 떠올려주기를 바라요. 당신의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가 너무 작은 배역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끝끝내 우리는 사랑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우리가 잠시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나는. 아픈 밤이에요. 달이 참 예뻐요. 그대, 안녕. 나는 오늘도 그대를 담을 말이 이렇게 많았지만, 그냥 없었던 걸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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