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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r 07. 2023

넬, '멀어지다'

우리가 아닌 우리

 사랑의 측면에서, '우리'라는 단어는 어쩐지 모를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낸다. 우리는 '우리'로서만 의미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에서 한 사람이 이탈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의미로 기능하지 못한다. 남겨진 한 사람만을 '우리'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일 때만 유효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무의미해진 우리를 바라볼 때는 종종 입술을 살짝 깨물게 된다. 한때 '우리'라는 단어는 참 많은 걸 머금은 단어였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약속한 것들이 참 많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우리는 '영원'과도 등가의 언어였다. 더 이상 '우리'가 아닌 우리는, 언젠가 '우리'라는 단어가 머금었던 모든 것들이 포기되고 버려진 무덤이기도 하다. 영원이라 굳게 믿었지만, 이제는 '찰나'조차 우리일 수 없는 '우리'.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엠마는 아델에게 '네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라고 말했다. 덜 사랑하고 더 사랑받았던 한 사람의 고마움이자 따뜻함일 수 있지만, 무한히 애틋한들 조금의 사랑조차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굉장히 아픈 대사였다. 사랑을 다룬 적지 않은 문화 예술 작품들을 접하면서 내가 특히 더 깊은 애상감을 느꼈던 때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닌 입장에서 우리라는 이름이었던 날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들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 꼭 듣는 음악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넬의 '멀어지다'다. 이 노래에서는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이 그 여정의 끝에 도달해 있다. 사랑의 시작에 '피어나다'라는 동사가 어울리는 건, 생명체로서의 특성이 사랑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랑은, 역시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 그 말은, 거의 대부분의 임종이 그렇듯 사랑의 죽음 또한 아프고 괴롭다는 이야기다. 넬의 '멀어지다'는 임종 직전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순서대로 아파하고, 슬퍼하고, 침묵하고, 그리고 마침내 멀어진다. 지는 사랑을 애도하며 화자는 생각한다. 어쩌면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이 실은 우연이나 집착이지는 않았는지. 그러면서 동시에 사랑을 이뤘던 운명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실은 우연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영원이기를 바랐던 혹은 영원이라 생각했던 '우리'가 '여기까지'라는 걸 결국 받아들여야 한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누군가는 각각의 사유로 헤어지고 있을 테다. 헤어짐은, 위에서 언급되었듯 대부분의 사랑이 공유하는 결말로서의 보편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헤어짐의 아픔을 달래줄 수는 없다. 모든 이별은 언제나 개별적인 고통이다. 하나의 이별을 경험했다고 다음 헤어짐 때는 반드시 더 괜찮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사랑의 크기가 클수록 헤어짐은 아프다. 넬의 음악 '멀어지다' 속의 두 사람은, 서로를 운명이자 영원이라 믿었을 정도로 서로 많이 사랑한 이들이었다. 그 사랑의 끝을 확인할 때는, 아주 아픈 아찔함이 몰려온다. 결국 우리도, 다를 게 없었구나. 결국 이렇게, 우리도 '우리'가 아니게 되었구나.


    가사 도입부에 등장하는 '어떻게 하죠?'라는 구절은 두 사람의 이별을 지켜보는 마음을 더욱 착잡하면서도 아프게 만든다. 사랑의 임종 단계에 돌입한 두 사람은 이제 무력하다. '우리'는, 이제 곧 '나'와 '너'가 되어 각자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어떻게 하죠?'라며 되묻는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고 있는 화자다. 무기력한 질문을 반복하는 사이 두 사람이 겪어야 할 이별은 이별대로, 마치 형이 집행되는 듯이, 혹은 정해진 절차가 있는 것처럼 진행된다. 아파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이내 침묵하고야 마는 과정이다. 넬의 음악을 들으면서 가장 놀랍고 공감할 때는, 언어화되기 어려운 감정들이 그들만의 언어와 멜로디로 표현된 음악을 접하게 됐을 순간인데, '멀어지다'에서의 이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이별의 말들은 아프고,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야 한다는 사실은 슬프며, 그렇기에 조용히 침묵하며 이 사랑의 결말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숙연한 모습이 연상된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느 조용한 카페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연인들을 떠올리고는 한다. 헤어짐을 앞두고 있지만, 우악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되려 차분하고 적막하다. 대신 서늘한 적막함이다. 서로를 염려하고 응원하겠지만, 그 이름이 사랑은 아닐 테다. 각자 삶의 행복을 빌겠지만 우리로서의 행복은 이젠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라는 이름으로 영원을 꿈꿨던 '우리'는, 이렇게 여기까지다.


    '어쩌면 우린 사랑이 아닌 집착이었을까요?', '어쩌면 우린 사랑이 아닌 욕심이었나 봐요'라는 후렴구의 두 구절은 사랑에 대한 회의감이 드러난 부분이다. 영원이라고 믿었던 사랑도 이렇게 저물었다. 그러니 이렇게나 허무하게 저물어버리는 것도 과연 사랑일까, 라는 생각이 화자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다. 하지만 화자는 정말로 집착과 욕심을 사랑이라 착각했던 게 아니다. 그랬다면 '어떻게 하죠?'라며 자꾸 되묻지 않았을 테다. 집착과 욕심은, 어쩌면 '더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더 사랑하기에 상대를 조금 더 원하고 궁금했을 테고, 그 사랑의 크기는 지금도 유효하기에 이별 앞에서 더 아플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무력하게나마 '어떻게 하죠?'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 테다. 곡의 마무리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우린 운명이 아닌 우연이었을까요?', '아마도 우린 영원이 아닌 여기 까진가 봐요'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어쩌면 우린'에서 '아마도 우린'으로 바뀌는 이 지점도 가슴이 많이 아리다. '어쩌면'과 '아마도'에는 온도차가 존재한다. '어떻게 하죠?'라며 이 이별을 조금은 부정하기도 했던 화자지만, '아마도'에 이르러서는 결국 헤어짐을 받아들여야 하는 체념과 단념을 보인다. 아파하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떨구며 침묵하는 이별의 과정이, '어쩌면'부터 '아마도'까지의 여정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우리'는 멀어졌다. 그렇게 멀어진 우리를 '우리'라 칭하는 건 더 이상 안 된다. 사랑이 아닌 우연이자 집착이었던 우리. 운명이 아닌 우연이고, 영원이 아닌 여기까지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우리라는 이름이었던 날들은, 이렇게 서로가 멀어지면서 마무리되었다. 우리의 날들은 끝났고, 결코 오지 않기를 바랐던 에필로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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