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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r 08. 2023

로로스, '송가'

천천히 또 처연히 당신을 보냅니다.

    비가 내린다. 오래간만에 내리는 비의 잔잔함이 나쁘지 않다. 빗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걸어왔다. 젖지 않으려 우산을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젖고 말았다. 애를 써도 안 되는 게 세상에는 아주 많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내리는 비에 비유하곤 한다. 우산을 아무리 잘 써도 내리는 비에 조금이라도 젖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동어반복이지만, '어쩔 수 없음'을 달리 대체할 언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내리는 비에 젖고야 마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어쩔 수 있는 일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이다. 당장 탄생과 죽음도 어쩔 수 없는 일들 아닌가. 그 어쩔 수 없는 일들 중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들도 있을 테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은, 그런 소망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태연히 삶을 침범한다. 내리는 비에 그렇듯, 우리는 이에 무방비하다.


    집에 들어와서는 로로스의 '송가'를 계속 듣는 중이다. '천천히, 처연히'라는 가사처럼, 아직도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다. 제목이 '송가'니, 이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노래다. 누군가를 보내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의 무게가 더욱 와 닿을 것이다. 붙잡으려 애를 쓰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슬프고도 안쓰러웠던 무력함의 기억은 여전히 서늘하다. 내리는 비에 젖고야 마는 것처럼, 정말 싫었지만 누군가를 보내야 했던 경험이 내게도 있었다. 떠나보내는 일은 슬프고도 힘들었다. 남겨지는 마음은 서글프고 초라했다. 남은 것이 없었다. 내가 보내야 했던 건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의 총체를, 아프게 떠나보내야 했다. 그날 내가 보냈던 건 한 시절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한 시절을 떠나보냈다고, 그 시절이 곧바로 추억으로 바뀌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과거에 머무른 마음은 자꾸 안쓰러이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결코 추억이라 부르기 싫었던, 이제는 추억으로 불러야 하는 그날들이었다.


    어릴 적의 나는 참 우산을 못 쓰던 아이였다. 사람이 우산을 못 쓸 수도 있나 싶지만, 정말 그랬다. 같이 우산을 쓰고 길을 걸어도, 결국 나만 더 젖고는 했다. 하지만 살면서 우산을 써야 했던 날들은 무수히 많았다. 무수히 많은 날들 동안 우산을 썼음에도, 나의 부박한 꼼꼼한 탓인지, 여전히 비가 오면 많이 젖는 편이다. 이 나이 먹도록 이러니,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멈출 줄 모르던 감정의 누수에 녹슬고 얼룩진 내 낡은 사랑이여'라는 구절이 로로스의 '송가'에 있다. '누수'는 물이 샌다는 소리다. 물이 샐 정도로 많은 감정을 쏟았던 그 낡은 사랑을, 그러니까 말하자면 '길었던 또 깊었던' 두 사람의 시간을, 이제는 '천천히, 처연히' 보내야 하는 화자다. 이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을 감당해야 하는 화자가, 마치 꼭 우산을 잘 못 써서 흠뻑 젖고 말았던 나의 어린 날을 보는 것 같다.


    누군가를 보내야 했던 지난날의 나 역시, 우산을 못 썼던 어린 날처럼 참 속절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 앞에 나는 무력했다. 떠나지 말라는 말은 공허했다. 한 사람과의 이별은, 참 많은 것들과 이별하는 일들의 시작이기도 했다. 날 따스히 어루만지던 다정한 손길에 안녕을 고해야 했다. 해사하게 빛나던 웃음과도 작별해야 했다. 찬란하게 눈부신 지난 시절을, 그렇게 '지난 시절'이라며 과거에 묻어야 했다. 그때 나의 마음은 너무 어렸다. 어린 내가 쉬이 감당할 수 있는 '어쩔 수 없음'이 아니었다. 이제야,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열렬히 사랑하다가도 서로를 보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게 연애의 보편적인 숙명이라는 것쯤은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야'다. 어린 내게는 지나치게 부조리했던 진실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어쩔 수 없는 일들에도 죽지 않고 견디고 버텼던 기억 덕분에, 우린 감정의 면역이라는 걸 얻는다. 한 시절을 오롯이 떠나보낸 후, 그 시절에 안녕을 고했던 두 손 위에 초라하게 남겨진 시간의 파편들이다. 시간의 조각들은 꽤나 날카로워서, 꼭 쥐려 할수록 더욱 고통스럽다. 세월의 굳은살은 그렇게 생겨 먹었다. 역시 부조리한 진실이다.


    어쩌면 '자람'이란, 인생에 수놓아진 부조리한 진실들을 아프게 밟아나가며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세상에는 '성장통'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잃음으로써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역설은 보면 볼수록 부조리하다. 부조리해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에 젖는 게 어쩌면 삶의 전부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가끔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내가 떠났던 혹은 나를 떠났던 사람을 떠올려 보고, 그래도 그때보다는 괜찮아진 마음에 이렇게 조금 자라긴했구나, 라고 작은 위안을 스스로에게 건네보기도 하면서. 함께 나눈 빛나는 시절이 더 이상은 없는데, 대체 이 따위 성장이 뭐가 좋은 건지는 도무지 모르겠다만. 이것 역시도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고, 그냥 그렇게 얘기해요. 그 눈물에, 상처에, 아픔에, 괴로움에, 애처로움에, 외로움에, 당신을 힘겹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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