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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y 06. 2023

최유리, '이것밖에'

삶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어느덧 서른이야. 신에게는 아직 만나이 찬스가 남아있습니다, 따위의 소리를 반복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냥 서른이라고 하다가, 만나이가 시행되면 남들 눈치 보면서 슬쩍 한 두 살 내리게 되겠지. 서른에 대해 꿈 꾼 적이 없으니 이에 대한 환상도 없었지만, 이토록 무미건조할 줄은 몰랐네. 그저 지극히도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에 물론 충분히 감사하지만, 잠시 감사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가라앉지 않으려 페달을 돌리고 있어야 하는 세상인라는 건 조금 가혹하게 느껴져. 태어나기 전에 신이든 누구든 ‘이게 네 인생의 시나리오야’라고 내밀어줬다면, 이 재미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코 될 수 없다고 투정을 부렸을 텐데. 

 

창대한 비상이나 힘찬 전진 같은 건 진작에 없었지. 멋지긴 하지만 모두가 그런 대단함을 추구해야 되는 것도 당연히 아니고. 그냥 나처럼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도 있어. 이에 ‘태어나 겨우 그렇게만 살 거냐며 힐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고. 그런데 요즘 자책까지는 아니지만 다소간의 아쉬움은 들어. 조금 더 상상해볼 걸. 너무도 긴 삶을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간단히 그려라도 볼 걸. 빈곤했던 고민이 후회 돼. 내 인생인데, 왜 조금 더 주체적이지 못했을까. 사실 억울한 것도 있지. 그냥 열심히 세상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것도 벅찼는데, 그런 막연한 미래를 언제 어떻게 꿈 꿀 수 있었냐고 항변하고 싶기도 해. 어딘가에 미쳐 절실히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면 ‘그랬구나’라고 다시 기회를 줄 세상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그럼에도, 내가 조금 더 나와 나의 시간을 아껴 나의 내일을 생각했다면, 인생이 조금은 더 재밌지 않았을까 싶어.

 

벌써 1월도 말일이 됐고,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는 자각에 별 생각을 다 하게 되네. 비범한 삶이 꼭 축복은 아니니까. 누구나 대단할 필요는 없으니까. 평범할 수 있음에 안도하고 오늘은 디딤돌 삼아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누가 감히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어.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별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아. 입시든 취업 준비든 쉬운 게 딱히 없었거든. 근데 만약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서 시간을 꼭 돌려야 한다면, 나는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는지 정도는 생각해볼 것 같아. 이왕 되돌려진 시간이니, 한 일주일 정도는 미친듯이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사실 행복이라고 적었지만, 행복은 너무 어렵잖아.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면 그게 고까워서 금방 뺏어가는 느낌이고. 긴 넋두리였네. 우리 삶에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불행하지 않게, 그래서 제 몫 정도 하면서 성실히 살아가자. 삶이 조금 양심적인 놈이라면, 이런 권태뿐만이 아니라 작은 환희라도 언젠가는 찾아오게 해주겠지. 


*몇 달 전 에브리타임 게시판에 올린 게시물을 조금 다듬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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