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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01. 2023

꿈 꿀 수 없는 꿈의 세대

12월의 단상

    저녁이 어둡다. 참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레 와닿는 퇴근길이었다. 지하철을 내려 역 밖으로 나올 때 세상은 어두웠고, 날씨는 살짝 싸늘했으며 그래서 조금 씁쓸했다. 어느새 한 해가 거의 다 흘렀구나. 하루는 긴데 일년은 빠르다. 오늘은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그러니 다행스러운 하루이기도 했다. 깨어있는 시간이 굳이 찬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무사한 안녕에 느끼는 안도감이 되려 행복과 조금 더 가깝다. 제법 큰 일교차가 지속되는 요즘이다. 이러다 어느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한파가 찾아오겠지. 눈도 내릴 것이다. 녹다 얼다를 반복하는 눈에 길은 미끄럽겠고, 아마 나는 매년 그랬듯 불평불만을 하며 거리를 걸을 테다. 들어주는 누구 하나 없음에도 내뱉는 불만이 매섭게 내린 눈보다 더욱 높게 쌓일 때 쯤에는 다시 봄이 아주 잠깐 얼굴을 비출 채비를 하겠지. 별일이 없다면 말이다. 봄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짧디 짧은 계절과 잠깐 나누는 재회마저 방해할 별일 같은 건 가급적 없기를 바란다. 언젠가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적 있었다. 텐트를 설치하는 것 이외에 딱히 할일이란 없던 잠비아의 한 국립 공원 캠핑장에서 저녁이 오는 걸 생각 없이 보고 있던 중이었다. 동물들이 차례로 떼를 지어 물을 마시러 왔다 떠났다. 마치 자신의 차례를 준수하는 듯했다. 강변의 지는 해가 곁들여진 순환의 경이가 지금도 생생하다. 별일 없음의 위안이 앞으로의 삶에도 꾸준하기를 소망한다.


    안온함과 무탈함이 좋다. 최소한 저 둘은 내게 있어서 최선의 가치들이다. 내겐 별다른 꿈이나 야망이 없다.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고 싶은 무언가도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여 별일 없이 살고 싶다. 별일이 생기는 걸 나의 최선으로 방지하고자 한다. 득점보다는 실점하지 않음을 선호한다. 점수를 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역설을 믿는 건 아니다. 점수를 내지 않았지만 이긴 것과 다름 없다는 싸구려 자기 위로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게는 이길 생각 자체가 없다. 경기 자체가 싫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와 승패를 갈라야 한다고 생각하면 피로감이 앞선다. 투쟁적으로 무언가를 쟁취해내는 성격이 아니다. 만성적인 무기력함일 수도 있겠지만 실망과 절망으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나는 단 한 치의 절망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원하고 좋아할 수록 실망이 커진다는 건 이런저런 일들이 내게 알려준 교훈이다. 삶의 어느 영역에서건 그리 믿음이 깊지 않는 나는 언제나 좌절의 가능성을 경계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도전하지 않게 되었다. 의식주에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면 딱히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모든 도전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상주하기 때문이다. 자아실현 혹은 꿈의 현실화는 그렇게 언젠가부터 영영 멀어지게 되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추구하는 삶 역시 개별적이고 제각각일 것이다. 서로 다른 성장과정과 배경으로 구성된 인격체들의 이상이 각자 다른 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니 내가 이렇다고 하여 진취적인 생에 갈급을 느끼는 누군가를 유난이라며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아쉽게도 반대의 경우로 각고의 노력으로 인생을 개척해나가야 한다며 삶에 당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다름의 가능성과 존중의 예의를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이다.


    젊음은 어때야 하고 청춘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설파하며 각각의 나이마다 이루고 수행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굳게 믿는 듯하다. 다분히 오만하며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서로 다른 수많은 생들을 함부로 범주화하여 공통된 방향으로의 걸음을 역시 빠르게 걷게 하려는 것 아닌가. 그런 이들은 때때로 꿈과 목표가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자신의 삶에 열심인 것과 누군가의 삶에 열심을 강제하는 건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이다. 설사 그들에 감응하여 치열히 도전했다가 실패를 마주했을 때 그 아픈 절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따위의 소리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의 자매품인 '사람은 실패를 통해 강해진다'는 발언 또한 제발 누구든 가급적 지양했으면 한다. 실패에도 정도가 있다. 어떤 실패는 백신이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실패는 한 사람을 아예 무너뜨린다. 무너지고 붕괴된 개인의 참담함과 비참함을 재빨리 달랠 수 있는 약을 나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영화 <머니볼>에는 "승리의 기쁨보다 패배의 분노가 더 크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별일 없는 생을 제 1의 목표로 두어, 삶이라는 경기에 선발 출전 선수 열 한 명을 모두 골대에 배치시켜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의 생의 방식을 함부로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길이 얼며 그러다 또다시 찾아온 여름에는 찌는 듯한 더위를 맞이하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삶을 방문하는 일들을 성실히 대하고 다음을 기다리는 인생도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 세대를 명명하는 일의 효용과 올바름에 대해 회의감을 자주 느끼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스스로와 또래를 '꿈의 세대'라 이름 붙이고 싶다. 낭만적인 워딩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적확히 말하면 꿈꾸기를 강요 받았지만 실은 꿈의 정의와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세대라는 의미다. 어느 해의 월드컵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기적을 간증한 것과 이 비극이 출발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다' 혹은 '하면 된다'는 집단적 각성이 이를 기점으로 폭발했던 건 아닐까 싶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 세상이 아니며, 기적은 기적이기 때문에 발생 빈도가 매우 낮다는 진실은 가볍게 잊혔다. 극기의 성공 신화들이 터져나왔지만 그런 기적같은 성공 사례는 되려 동기부여보다는 위축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왜 굳이 '극기'의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담론과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억이다. 실패와 좌절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포용은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갔다. 실패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됐다. 극복되지 못한 상처와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는 '나약함'이라는 낙인이 잔인하지만 찍히기도 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유하기보다는 얼른 일어나 다시 전력으로 달리기를 채근했다. 어린 나이부터 나는 그런 세상이 제법 폭압적이라고 느꼈다. 달려야 하니까 달렸던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일단 저기까지 뛰라길래 뛰었을 뿐이었다. 저곳은 어디고 왜 뛰어서까지 가야 하는지, 왜 나는 이 달리기에 참여를 해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뭘 위해 무릎이 까져도 뛰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나의 무기력함과 패배로부터의 보신주의는 어쩌면 너무 빨리 삶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남은 부산물일 수도 있다.


    나는 소비를 좋아한다. 소비를 가능케 하는 물질적 풍요를 결코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동경까지도 한다. 경제적 부유함을 통해 삶이 윤택해지고 더 흥미로울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 부유함을 두 글자로 '성공'이라고 하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성공의 뒷면에는 실패가 있다. 죽어라 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에는, 죽어라 해도 안 되는 게 세상에는 가득하다고 답하고 싶다. 엄청난 노력 같은 걸 기울이지 않고 당장 성공이 찾아올 수 있다면 나는 버선발로 마중을 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겐 염치와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고, 삶을 날로 먹고 싶어도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 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원했던 무언가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시작 혹은 도전조차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내게도 나약함의 딱지를 붙인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나를 지키는 데 열심이고 최선을 기울일 뿐이다. 너무도 간절했던 소망을 이루지 못해 깊이 절망하느니 그저 바라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다. 무너지고 싶지 않다. 꺾이고, 아프고 또 휘청거릴 날들이야 많겠지만, 끝내 무너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무너짐의 괴로움을 알고 두 번 다시는 그 고통을 겪고 싶지 않기에, 섣불리 무언가를 원하거나 갈구하지 않게 되었다. 안온함과 무탈함은 내게 정말 소중한 미덕이다. 다양한 당위 부여로 내게 혹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무의지하고 나약하다며 누군가가 비난 세례를 하려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실패와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악착같이 최선으로 지키고픈 이런 선택과 삶도 세상에는 존재한다고. 그토록이나 당신들이 찬미했던 그곳에 끝내 이르지 못해도 삶은 멀쩡히 흐를 수 있다고. 그리고 묻고 싶다. "그래서 그곳엔 무엇이 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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