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기
2005년 8월 31일
며칠 전 랄라가 디카를 망가트렸다.
작년 10월에 진짜 큰마음먹고 구입해서 10개월 동안 내가 아끼고 아끼던 보물을 우리 랄라가 단 한방에 K.O. 시킨 것이다. 오 마이 갓!!! 이 말은 진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일 거다. 그 날밤 랄라가 꼬물꼬물 손장난을 치며 내 디카에 눈독을 들일 때부터 인정사정 볼 거 없이 그냥 손에서 뺏었어야 했다. 랄라가 막간을 이용해 카메라 줄을 낚아채 이층으로 후다닥 뛰어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열심히 뛰어 뒤쫓아 갔으나, 우리 침실에서 스톰과 함께 치~즈~ 를 연발하며 재미있게 사진 찍기 놀이를 하는 랄라의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앞서 그만 분별력을 잃었던 내 죄가 크다.
난 처음에 스톰이 랄라가 디카를 망가트렸다고 했을 때도 농담하는 줄 알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맨바닥도 아닌 카펫에 떨어트렸다면 별 큰일이 있었겠나 싶어서였다. 근데 여유 있던 내 얼굴도 디카 상태를 확인해 갈수록 점점 일그러졌다. 사진기의 전원 스위치가 먹통이고, 무엇보다 카메라 렌즈가 앞으로 나오지 못해 꺼억 꺼억 소리만 내고 있었다. LCD 모니터는 초록색 줄무뉘가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것이 아무래도 복구 불가능이라는 직감이 순간 머리를 솨아~악 하고 스쳤다.
너무너무 화가 났던 나는 랄라에게 이건 네 장난감도 아닌데 왜 함부로 가지고 놀다가 이렇게 망가트렸냐고 혼낸 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랄라는 그냥 한마디만 쑥 내뱉을 뿐이었다.
"엄마, 디카 망가!"
날 더 열 받게 한건 다름 아닌 스톰이다. 아니 분명히 5분 전까지만 해도 랄라랑 같이 놀고 있었으면서 아이가 디카를 망가트릴 때 뭐 하고 있었냐고 물으니 스톰 대답이 정말 어이가 없다.
"난 그대가 아이를 보고 있으래서, 랄라를 여기서 이렇게 보고 있었지."
"뭐라고?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야?"
"아니... 난 그냥 침대에 누워서 랄라를 보고 있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으악---- 정말 오 마이 갓!!!이다. 오 마이 갓!!!"
고장 난 디카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면서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스톰과 랄라에게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불붙은 머리부터 식히려고 자동차 키를 집어 들고 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스타벅스에서 달달한 캐러멜 마끼아또를 시켜 마시며 책들을 둘러보았다. 이 상황에도 엄마라는 꼬리표는 떼어지지 않는지, 내 발길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랄라가 좋아하는 아동도서 코너였다. 나는 가슴의 답답함을 다스리며 서점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Pablo Neruda의 시집 한 권과 Gustav Klimt의 작은 화보집 한 권을 구입해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랄라와 스톰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한쪽 가슴이 쏴~ 한 것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꿀꿀한 기분을 날려 보내려 핑크색 매니큐어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처량 맞게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는데, 문득 나의 어릴 적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이 나는 게 아닌가.
아마 내가 초등학생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덤벙거리다가 할머니께서 머리맡에 벗어두신 새 안경을 밟아, 고칠 수 없을 만큼 안경다리를 휘게 한 적이 있다. 어릴 적 안질을 앓으셨던 할머니께서는 그 후유증으로 시력이 상당히 나빠서 할머니의 안경은 곧 할머니의 눈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렇게 소중한 할머니의 안경을 나의 부주의로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조심성 없이 왜 그렇게 덤벙거리냐며 꾸중하셨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떡하겠냐며 더 이상 크게 혼은 안 내셨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건, 새로 장만하자마자 망가져 버린 그 안경이 안타까우신지 손위에 올려놓으시고 한참을 만지며 한숨을 쉬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다.
디카 망가 사건 하루 뒤,
아침 출근/등원 길에 스톰과 랄라는 아래와 같은 전화 메시지를 내 앞으로 남겨놓았다.
스톰: "랄라야 얘기해"
랄라: "엄마"
스톰: "미안합니다 그래"
랄라: "먄합니다."
스톰: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랄라: "먄해요."
스톰: "엄마 사랑해요"
랄라: "샹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