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의 꿈

육아일기

by Rainsonata

2006년 1월 20일


요즘은 대부분 모든 집에 붙박이 장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런지 장롱 문화를 접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아주 어릴 적 할머니가 쓰시던 장롱 안의 널찍한 아래 서랍은 그야말로 보물상자나 다름없었더랬다. 할머니께서 차곡차곡 접어놓으신 고운 한복 여러 벌과 두루마기가 있었고, 핑크빛 망사주머니 사이로 병원 냄새가 풍기는 좀약이 들어 있었고, 구슬 핸드백과 모시며 삼베니 하는 옷감들이 한쪽에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는 양장점이 한국 여성의 트렌드를 주도하던 시절이었기에, 어디 어디 양장점 또는 어디 어디 부티크라고 적힌 옷걸이에는 100% 핸드 메이드로 견고히 만들어진 양장 몇 벌이 도도히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들이 들어있던 곳, 구수하고 달콤한 전병 과자와 지금은 너무 흔해빠진 미제 캐러멜이 손수건에 쌓여 숨어있던 곳, 포장을 풀지 않은 채 모셔놓은 선물상자들이 정갈히 놓여있던 곳, 향기 좋은 비누, 꽃수가 놓인 손수건, 할머니가 장 보러 가실 때 드시던 동네 보석방 이름이 새겨진 조그만 손지갑이 제각기 고유의 자리를 차지한 채 숨 쉬며 있던 곳.


갑자기 나의 생각이 추억을 더듬어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장롱 속의 신비한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랄라 때문이다. 오늘 저녁 늦게 이불과 침대 시트를 포함한 대대적인 침구 빨래를 마치고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랄라가 이 층에서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를 연거푸 불렀더랬다. 솔직히 귀찮은 마음이 앞서 스톰을 먼저 올려 보냈더니 이번에는 올라갔던 스톰까지도 빨리 올라와 보라고 호들갑이 아닌가. 도대체 또 무슨 사건이 터졌나 싶어 바로 뛰어 올라갔더니, 손님방에 있었던 몇 점 안 되는 가구들을 끌어모아 기둥과 받침대를 만든 뒤, 빨아놓았던 침대 시트와 담요들을 이용해 텐트를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랄라와, 아이보다 더 뿌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스톰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랄라가 만든 텐트 안에는 우리 결혼사진 액자, 알람시계, 탁상시계, 라벤더 향초, 민순이, 밸런타인, 곰돌이 푸우, 랄라 동화책, 크리넥스 휴지, 베개, 쿠션, 이불이 작은 텐트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좁은 바닥에 스톰, 나, 랄라 이렇게 셋이 나란히 누워 아직 축축이 젖어있는 침대 시트의 꽃무늬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할머니 장롱 속에 숨어 최대한의 아늑함을 즐기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스톰과 랄라의 숨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자니 널찍한 주거공간이 주는 편리함보다, 오히려 좁고 아늑한 공간이 주는 따뜻함이 새삼 친근하며 고맙게 느껴졌다.


오늘 밤 우리는 랄라가 만든 텐트 안에서 함께 자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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