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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Sep 06. 2022

그날의 기록

육아와 성장

2022년 9월 6일 화요일


캘리포니아는 9월 1일부터 시작한 어마 무시한 폭염으로 전력 부족과 산불 주의보가 아직도 발령 중에 있다. 랄라는 한국의 가을 하늘이 그립다고 했다. 이렇게 더울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일주일 더 머물다 올 걸 그랬다며 푸념도 늘어놓았다. 하지만 엘리와 루피를 번갈아 안아주는 랄라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육아일기를 들춰보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글을 만났다.



2007년 1월 26일


봄학기 가장 재미있게 듣고 있는 강의는 다름 아닌 "Theories of Human Developlmet."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날을 계획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몹시 흥미로운 수업이다. 이 과목을 듣게 되면서 몇 년 동안 잊고 지냈던 랄라의 유아기를 좀 더 깊이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2년 전의 나에게 지금 만큼이라도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랄라에게 더욱 이해심 깊은 엄마가 되어 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중의 대표적인 예로 랄라가 23개월일 때 적은 나의 일기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2004년 9월 8일

6:30 랄라 일어나다!

-주스 마시다가 소파에다 붓기
-한번 혼나고 나서 이번에는 카펫에다가 주스 붓기


당시 나는 랄라가 주스를 소파에 부은 뒤 또 카펫에 붓자 주의를 주어도 내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살펴보니, 랄라가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랄라는 소파에 주스를 붓는 대신 이번에는 카펫에 부은 것이다. 왜냐? 엄마가 소파에 붓지 말라고 했지 카펫에도 붓지 말라는 말은 아직 안 해줬으니 몰랐던 것뿐이다.


-베이글 먹다가 마룻바닥에 문지르기


두 살 전후로 아이들은 뭐든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호기심이 왕성한 시기라고 한다. 랄라가 베이글이 먹는 음식인지 알면서도 바닥에 문 지러 본 것은 하나의 실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색연필로 소파에 낙서하기
-한번 혼나고 나서 이번에는 마룻바닥에다 낙서하기


주스 사건과 비슷한 경우다. 랄라는 내가 색연필로 소파에 낙서하지 말라고 하자, 이번에는 새롭게 마룻바닥에다 낙서를 시작한 것이다. 


-화장실 변기 뚜껑 닫고 올라서서 엄마 화장품 가지고 놀기
-그중 몇 개는 타일 바닥에 떨어뜨리기


랄라가 본 세상을 상상해 보자. 맨날 엄마 아빠 다리, 식탁 다리만 보고 다니다가, 변기 뚜껑을 닫고 올라서서 보니 얼마나 세상이 다르게 보였을까. 향긋하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화장품이 각각 다른 모양의 용기 담긴 모습이 랄라의 눈에는 얼마나 흥미로워 보였을까. 한 번 두 번 바닥에 떨어뜨려 보면서 랄라는 새로운 공간감각을 체험했을 것이고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청각적 자극도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랄라의 안전을 위해 유리 제품은 미리 치워두었으므로 엄마도 안심)


-엄마 몰래 욕실 문 뒤에 숨어서 치약 짜서 먹고 입맛 다시기


신 레몬을 자꾸 먹는 아이들이 많은 이유는 신맛이 주는 미각적 자극 때문이라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랄라가 맛보고 싶었던 민트향의 치약 또한 랄라의 미각을 자극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우유 컵에 손 넣고 조몰락거리기

-한번 혼나고 나서 이번에는 위글즈 CD 위에 우유 붓기


앞서 말한 주스, 색연필과 같은 경우다. 엄마가 우유 컵에 손을 넣지 말라고 하자, 랄라는 다른 방법으로 우유를 실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랄라가 제일 좋아하던 위글즈 CD를 우유로 버려 놨을 때, 내가 빨리 닦아주고 음악이 다시 나오는지 틀어주었는데, 그때 랄라가 나를 바라보며 아주 행복하게 웃던 모습이다. 

이 모든 일이 1시간 30분 동안 벌어진 일이라면 사람들이 믿을까?

두 살 또래 아이를 키워보신 분들은 모두 믿어주실 듯.

8:00 엄마는 소파 커버 몽땅 벗겨서 빨래 시작


엄마가 빨래하는 모습을 본 랄라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을까? 랄라가 버려놓은 소파 커버를 벗겨서 빨래를 시작하면, 엄마가 그동안 랄라랑 못 놀아주게 되니까 다음부터 소파에는 낙서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아직도 미스터리!

9:30 두 시간 전에 타놓은 커피를 이제야 부엌에서 발견한 엄마


2007년 1월 26일 


3년 전의 기록에는 초보 엄마와 호기심 가득한 아기의 좌충우돌 생존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는 열린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라고 자부해왔는데, 대학원에서 배우고 있는 새로운 지식을 토대로 과거의 상황을 재해석해보니, 많이 부족하고 서투른 엄마였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기에 앞으로 꾸준히 배움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다짐 또한 더욱 확고해진다. 무지에서 벗어나 잘못된 행동은 깨닫고 수정하면서 지혜롭게 랄라를 지지해줄 수 있는 엄마로 성장하고 싶다. 


2022년 9월 6일


2004년 일기로부터 18년이 흘렀고, 2007년 일기로부터 15년이 흘렀다. 과연 나는 오래전 다짐했던 약속을 스스로에게 지켰을까 되물어본다. 배움의 길을 꾸준히 걸어온 것과 잘못된 행동은 깨닫고 수정한 부분은 대체적으로 지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무지 투성이다. 지혜롭게 랄라를 지지해 주는 엄마로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보류해 두어야 할 것 같다. 랄라와 맺은 엄마와 딸의 인연이 지속적이듯, 엄마로의 성장 또한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랄라를 일방적으로 지지해줘야 하는 시기는 지났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앞으로도 나는 배움의 길을 걸을 것이며,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일상을 경건하게 대하는 마음가짐을 소중히 지켜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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