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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Aug 29. 2022

슈퍼비전

Clinical Supervison

2022년 8월 29일 월요일


미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심리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할 때까지 나를 지도해주시고 감독해주신 모든 슈퍼바이저는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 교수와 심리치료사였다. 그분들 덕분에 심리치료에 유용한 영어적 표현이나 기술에 대해 배울 수 있었지만, 늘 한편으로는 만약 한국어로 슈퍼비전을 받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화적/언어적/심리적 스트레스나 번아웃을 조금 더 적절한 말로 풀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심리치료의 기술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각 문화의 다양성과 미묘한 뉘앙스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슈퍼비전이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난 이 생각을 오래 잊고 살았다.


3000 시간의 임상 경험과 200 시간의 슈퍼비전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런 상상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차근차근 주어진 길을 걸어갔고, 덕분에 심리치료사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사실 개인마다 처해진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 긴 여정을 완주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외로 많다. 그러므로 나도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국가 면허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크게 안도했다. 시험 결과를 듣고 슈퍼바이저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교수님께서 덕담과 함께 앞으로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문화적 민감성을 성장시키는 환경에서 심리치료와 슈퍼비전을 제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야기의 화제가 문화적 역량으로 옮겨지자, 나도 대학원 시절부터 느꼈던 한계와 아쉬움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본인이 슈퍼바이저 자격증을 취득해서,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좋은 슈퍼바이저가 되어주면 어때요?" "상처받고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 진정한 심리치료사가 된다는 말 들어본 적 있죠? 그것처럼 자신이 수퍼바이지 시절에 문화적 측면에서 아쉽고 부족했다고 느꼈던 부분을 보완해서 슈퍼비전을 제공한다면, 그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교수님의 권유에 마음이 움직인 나는 그 자리에서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네, 한번 해 볼게요." 그러자 교수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시더니 슈퍼바이저 자격증 취득을 위한 요건 문서와 수강해야 하는 강의 목록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나는 그 만남으로부터 2년이 더 흐른 뒤에야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시던 교수님의 화사한 웃음이 아직도 마음 한편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드디어 한국어 슈퍼비전을 원하는 인턴과 멘티들에게 모국어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자, 나는 그동안 미뤄둔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수퍼바이지와 나누는 대화의 폭은 넓고 깊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슈퍼비전은 한층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우리는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문화적 차이를 토론하고 각자의 다름을 존중해가는 과정을 통해, 상호적 이해가 주는 편안함을 체험했다. 내게 심리치료사라는 직업은 참으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천직이다. 한편 슈퍼비전의 시간은 서로의 성장을 돕고 넉넉한 소속감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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