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日是好日
2013년 8월 19일
얼마 전 아주 기이한 체험을 했다.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나는 좌측 안면근육 마비를 앓은 적이 있다. 당시는 정말 공부에 목숨 걸던 시절이었기에, 그날도 기말고사를 앞두고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거울 앞에는 부자연스러운 나의 눈꺼풀과,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해진 입술이 감각을 잃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날의 공포가 엄습해 올 때가 있다.
아무리 기말고사가 기간이었다고 해도 모든 걸 내려놓고 당장 한국에 나가 치료를 받았더라면 완치될 수 있었던 병이었는데,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숨기고 혼자 어떻게 해 보려고 미련하게 애쓰다가 결국은 병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나의 안면근육은 점점 마비되어갔고, 결국은 왼쪽 눈마저 감기지 않아 한 달 정도 눈을 뜬 채로 잠을 청해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둔하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처사였지만, 당시 나에게는 영어 울렁증을 견디며 열심히 공부해서 이뤄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욕심이 훨씬 더 컸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 한 학기 동안 휴학을 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또 같은 과목들을 수강하고 이토록 고된 시험을 또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무섭고 두려웠다.
여하튼 모든 선택에는 결과와 책임이 따르듯, 나는 그 해 가을학기를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할 수는 있었지만, 이듬해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안면근육이 너무 굳어진 상태라 평생 완치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여러 의사/한의사 선생님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 뒤로 나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잠이 부족하거나, 신경을 쓰거나, 피로가 쌓이면 유난히 경직되거나 미세한 경련을 일으킨다. 나는 그럴 때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다.
며칠 전 좌선 중에 나의 좌측 눈썹 위로 이마에 작은 혹 같은 응어리가 만져졌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눌러보니 근육이 단단히 뭉쳐진 듯, 이미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 듯 보였다. 처음에는 근육을 이완해주려는 마음으로 손으로 어루만지며 마사지를 시작했는데, 몇십 분을 그렇게 조물 거려도 좀처럼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굳은살이 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포기하지 않고, 그날은 하루 종일 그 응어리를 풀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문지르고 다독이고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급기야 저녁녘에 이르러서는 내 이마 반쪽에 붉은 반점 같은 멍이 들기에 이르렀고, 밤에는 좌측 이마 전체가 후끈거리고 손가락만 살짝 데도 피부가 아파서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정도였다.
잠들기 전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찬찬히 이마를 살펴보니, 예상대로 이마에는 피멍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딱딱했던 응어리는 넓게 골고루 퍼져, 이제 어느 한 부분만 돌기 되어 있는 듯 한 느낌은 없어졌다. 그 뒤 며칠 동안은 세수를 하거나 얼굴에 로션을 바를 때도 왼쪽 이마의 표피가 아파서 이가 시릴 정도였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정말로 시간이 흐를수록 붉은 반점 같은 멍이 옅어지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니 뭉친 근육이 놀라울 만큼 완화되어, 그냥 봐서는 오른쪽 이마와 큰 차이를 모를 정도로 왼쪽 이마가 제법 평평해졌다.
오늘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비단 근육이 뭉쳐서 만들어진 응어리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혼자 끙끙 앓으며 마음속 깊은 응어리를 풀지 못해 생긴 '화병'에 대해 생각했다. '화병'은 "울화병이라고도 하는데, 화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오랜 세월 동안 풀지를 못하여 생기는 병으로, 그 증상의 대부분이 화나 열의 양상을 띠는 병"이라고 한다. 화가 나면 불이 위로 타오르는 것처럼 "열감이 가슴이나 그 위 부분 즉 얼굴 머리 부분까지 뻗치는 현상"을 말한다고도 한다.
이마에 뭉친 자그마한 응어리를 푸는데도 제법 시일이 걸리고, 꾸준한 관심과 마사지가 필요했으니, 오랜 세월 가슴에 안고 살아온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과 인내를 요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슴의 응어리를 인지하고, 지속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어루만져 주는 용기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정말 오묘하기 그지없어서, 쓰다듬고 사랑해주면 신체의 통증은 완화되고 마음은 편안해진다. 늘 책으로만 읽고 머리로만 이해하던 신비로움을 몸소 체험하고 나니, 자신 있게 주위 사람들에게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건 마음이건 단단하게 굳어버린 응어리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잘 어루만져 주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맺힌 응어리가 풀어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