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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事

日日是好日

by Rainsonata

2013년 8월 14일


랄라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집 일상은 다시 시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주부 13년 차를 맞이하는 나에게 집안일이란 지금까지도 힘든 연구대상이다. 처음에는 뭐든지 잘하려는 마음에 스스로의 목을 졸라 맨 것 같고, 랄라를 낳고 키우면서는 가사에 육아가 합쳐지면서 완벽주의의 정점을 찍은 것 같다. 그리고 랄라가 유치원에 입학하고 내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나의 아상을 허물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수용하는 값진 경험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시간은 제법 흘러 스스로 많은 것을 내려놓은 지금. 가사(家事)하면 떠오르는 첫 키워드는 다름 아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물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이전에, 나 자신에 대해 속속히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아이들도 문과, 이과, 공과, 예술, 체육으로 그 관심이나 재능이 나뉘는 것처럼, 우리 엄마들도 청소, 빨래, 요리, 인테리어, 설거지 등으로 그 관심과 재능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파악해야, 집안일이 조금 더 수월해진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토대로 깨닫게 되었다.


일단 나의 예를 들면, 난 정말 체력이 최하등급이다. 신은 공평하다는 것을, 나는 나의 변변치 않은 체력과 광대한 집중력의 조합을 보면서 매일 느낀다. 신은 나에게 육체적인 한계점은 가장 낮게 설정해 주셨을지언정, 나의 정신적 인내는 최고봉을 선물해 주셨다. 그리고 너무도 다행인 것은 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학습하고, 스스로 실험해 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데, 이것이 집안일을 어떻게 보다 효과적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어주었다.


내가 집안일을 할 때는 일단 준비물이 몇 가지 필요하다.


1. 용모 단정한 나를 준비한다. (집안일을 너무 오래 하다 보면, '내가 부엌데기야?'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에, 오늘 해야 하는 집안일이 유난히 많은 날일 수록 스스로를 예쁘게 가꾼 뒤 일을 시작해야 기분도 상쾌하고 꿀꿀한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다. 집만 열심히 가꾸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면 그건 좀 슬플 것 같다.)


2. 음악을 준비한다. (나에게 음악은 영혼의 밥이다. 그날그날 기분에 맞춰서 음악을 준비한다. 위에서 말한 '일체유심조' 모드로 들어가는 지름길은 바로 아름다운 음악과의 공감이다.)


3. 간식을 준비한다. (나는 밥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군것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커피, 차, 주스 같은 음료를 한 가지, 오물오물 집안일을 하면서 먹을 수 있는 사탕, 초콜릿, 젤리 중에서 한 가지, 그리고 신선한 과일을 집안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언제든지 생각나면 손쉽게 꺼내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 일단 집안일 준비 끝! 우선 시간을 확인 한 뒤, 절대로 30분 이상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시작할 것인지 동선을 찬찬히 그려보고, 그에 맞춰 일을 해나간다. 물론 틈틈이 휴식을 취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내가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아래와 같다.


싱크대에 잔뜩 쌓여있는 설거지거리 앞에 서면 - '아……. 이 모든 그릇들이 뽀드득뽀드득 깨끗하게 닦여서 각자의 자리에 들어가 편하게 쉬는 모습을 상상해 봐. 그래서 예쁜 그릇들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스톰과 랄라에게 내어 줄 생각을 해봐!'


빨래 바구니에 가득 쌓인 빨래 거리 앞에 서면 - '흠……. 이 빨래들이 모두 깨끗하게 세탁된 뒤, 좋은 향기가 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그렇게 각자의 옷장 속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 가족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고, 몽실몽실 랄라의 엉덩이를 깨끗한 속옷이 감싸줄 거야.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


먼지+고양이 털 가득 쌓인 거실 앞에 서면 - '그래……. 인생 공짜란 없는 거야. 내가 고양이! 고양이! 하면서 막상 고양이들을 예뻐하는 것만 좋아하고, 고양이들이 흘린 털들을 청소하지 않는 건, 마치 내가 랄라의 찰랑찰랑 머릿결을 예쁘다고 늘 쓰다듬으면서, 아이의 머리카락이 온 집안에 돌아다녀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야. 무엇이든 거두었으면 책임을 지는 거고, 난 고양이들을 선택했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마땅히 완수해야 하는 거야. 동전의 양면을 떠올려봐!'


주로 이렇게 나는 인과 관계와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집안일들이 모두 마무리되었을 때 만나게 될 좋은 결과물들에 대해 미리 마음속에 그려보고 집안일을 시작한다. 정말 좋은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좋은 뜻을 내면, 이미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얼굴 표정이 온유해지고, 마음이 산뜻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하기 싫어도 하고 싶어도 집안일은 주부인 나로서는 피해 갈 수 없는 과제물이지 않은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난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싶다. 집안일이 나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의지대로 집안일을 쥐락펴락 하면서 주체의식을 가지고 한 가지씩 차근차근해 나가고자 노력한다.


얼마 전, 미국의 유명한 교육담당 기자 한 분이 어느 중학교에서 일 년 동안 아이들과 지내면서 관찰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을 읽었는데, 그 안에 보면, "특히 중학생들은 집에서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단지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라는 대목을 읽으며 가슴이 뜨끔했었다.


난 랄라에게 초등학교 내내 도시락을 싸서 보냈더랬다. 그래서 중학교부터는 랄라가 학교 식당을 이용해 주면 좀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더랬다. 그러나 랄라는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부터, 이미 나에게 중학교에 가서도 엄마 도시락을 먹고 싶다고 말했고, 매일 새벽 랄라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상 또한 그녀의 중학교 입학과 함께 다시 시작된 것이다.


어차피 아이의 도시락을 준비해야 한다면, 난 좋은 마음으로 랄라의 밥을 챙겨주고 싶다고 다짐한다. 도시락 가방을 열면 그 안에 엄마의 온기가 느껴지는 음식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고, 잠시나마 랄라는 집을 떠올릴 것이다. 엄마의 웃음을, 아빠의 목소리를, 우리 집 냄새를……. 설사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는다 해도,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도시락 싸주는 것, 뭐 대단한 일 아니지 않은가. 옛날 엄마들은 아이들 서넛 키우시면 서도 당연히 해 내셨던 일들이지 않은가.


가사(家事)란 하나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 가족을 보듬고 어루만져주는 최고의 힐링은, 어쩌면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집안일을 통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법정 스님께서는 삶의 숙제를 피하지 말고, 그 숙제를 지혜롭게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성숙함을 꽃피우라고 말씀하셨다. 내 인생에 있어서 집안일이란 그런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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